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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보련 Apr 18. 2021

진짜 가짜에게 감사를

<첼로를 사랑하는 목수 -나무03>

  나무는 많은데 나무가 귀하다. 앞뒤가 안 맞는 말인 것 같지만 우리나라의 현실이 그렇다. 국토의 65%가 산이고 모든 산이 풀과 나무로 뒤덮여 있는데도 그렇다. 사실 몇십 년 전만 하더라도 ‘민둥산’이니 ‘산림녹화’니 하는 말을 늘 들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귀하던 시절 땔감으로 나무는 물론 나뭇잎까지 싹싹 긁어다 때다 보니 마을에서 가까운 산들은 죄다 민둥산이었다. 그런 산을 살리고자 산림녹화 사업이 이루어졌고 큰 성공을 거두었다. 오죽하면 <산림녹화성공 기적의 나라 한국>라는 책이 나왔을까.


산림녹화, 다들 기적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산림녹화에 성공한 까닭에 산마다 나무가 빽빽한데 왜 나무가 없다고 하는 것일까? 정확하게 말하면 쓸 만한 나무가 없다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건축, 가구, 공예 등에 쓸 만한 적당한 나무가 충분하지 않다는 말이다. 산을 푸르게 채우는 것만으로 그 가치를 충분히 하는 것이긴 하지만 이런 용도로 쓰지 못한다면 ‘땔감’으로나 쓸 수 있는 잡목에 불과하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것일까?


  우리의 산에 가장 흔한 나무는 무엇일까? 소나무가 떠오른다면 50점이다. 애국가에도 ‘남산 위의 저 소나무’가 나오고, 우리 가요 전체를 뒤져 보더라도 소나무가 제일 많이 나온다. 심지어 저 먼 나라 독일의 <O Tannebaum>이 본래 전나무이고 영국 노동당의 비공식 당가인 <적기가, The Red Flag>로 쓰인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 소나무야>라고 번안해서 부르기도 한다. 그만큼 소나무가 우리의 사랑을 받는다는 증거이긴 하지만 소나무는 우리의 산에서 두 번째로 많은 나무이다.


바위 위에서 자라는 소나무, 보기에는 멋있지만 막상 쓸 데가 없다. 물론 눈으로 감상하는 것이 진짜 쓸머이기는 하지만.


  우리 산에 가장 많은 나무는 참나무다. 그런데 이름 ‘참나무’에서는 강력한 위용이 느껴진다. 동식물 이름에 ‘참’이 붙으면 말 그대로 ‘진짜’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참새’와 마찬가지로 ‘참나무’는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 약간 갸우뚱해지기도 한다. 모양새, 크기, 용도 어느 것을 살펴봐도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참나무를 나무 중의 나무로 봐야 할 이유가 없다. 가장 많은 나무이기 때문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우리가 통상적으로 ‘참나무’라 뭉뚱그려 말하지만 참나무의 종류는 꽤나 다양하다. 묵을 쑤어 먹는 도토리가 열리고 나뭇잎 중에 가장 흔한 ‘갈잎’을 가진 모든 나무가 참나무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 신갈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여섯 종으로 분류한다. 잎이나 도토리 모양이 종류에 따라 다 다른데 관심을 가지지 않는 한 구별하기 어렵다.


참나무와 도토리, 우리 산에 가장 흔한 나무이자 열매이지만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종류도 많고 절대적인 숫자도 많은 참나무이지만 막상 쓰려고 하면 애매하다. 산에서 자연적으로 자라는 것 중에서 충분히 굵고, 곧고, 긴 것이 없다. 대개 별로 크지 않은 데다 꼬불꼬불하기까지 하다. 그래도 좀 크고 곧은 것이 있어서 쓰려고 제재를 해 놓으면 엄청나게 갈라지고 뒤틀린다. 이런 나무로 가구나 공예품을 만들었다가는 반품을 감당하기 어렵다. 그래서 옛날 건축물이나 가구를 보면 참나무로 만든 것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다.


  두 번째로 많은 소나무도 그 종류가 수없이 많은데 참나무보다는 그래도 사정이 낫다. 수종에 따라 곧고, 굵고, 길게 자라는 것도 있고 자라는 지역에 따라 특별히 품종이 좋은 것들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금강송은 곧고 길게 자라서 쓸모가 많고 경북 봉화군 춘양면의 소나무는 옛날부터 궁궐을 지을 때 썼던 나무라서 따로 ‘춘양목’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상당수의 소나무는 그리 크지 않고 굽어 있다. 벌목을 한 후 껍질을 벗겨놓지 않으면 바로 곰팡이가 생기기도 한다.


  이렇듯 별로 쓸모가 없는 참나무를 영어 이름인 ‘오크(Oak)’라고 부르면 느낌이 확 달라진다. 오크는 위스키 발효를 위한 통뿐만 아니라 고급 가구재로 인기가 높다. 특히 북아메리카산 오크는 색, 결, 질감 등이 우수하고 공급도 원활해서 많은 가구에 널리 사용된다. 이렇듯 생물학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는데 ‘참나무’와 ‘오크’는 쓸모도, 주는 느낌도 꽤 다르다. 물론 기후와 토양의 영향 때문이지만 영어로 쓰면 좀 있어 보이는 심리도 어느 정도 작용한다.


참나무의 영어 이름 오크(Oak), 고급가구에 많이 쓰인다. 심지어 가짜 나무 위에 붙이는 필름 중에서도 제일 흔하다.

  소나무도 영어 이름인 ‘파인(Pine)’으로 부르면 사정이 달라진다. 건축현장이나 인테리어 현장에 가보면 일정한 규격의 희고 무른 나무들을 볼 수 있다. 흔히 ‘구조목’이라고 부르는 나무인데 영어 약어로 SPF로 통칭된다. 비슷한 성질을 가진 침엽수 스프러스(Spruce, 가문비나무), 파인(Pine, 소나무), 퍼(Fir, 전나무)인데 북아메리카를 비롯해 추운 지역에서 매우 잘 자라고 곧고도 길어서 건축재로 매우 유용하다. 물론 값도 싸다. 우리 땅의 소나무 중 일부도 여기에 낄 수 있겠지만 그리 많지 않으니 수입해 쓰는 것이 더 싸다.


구조목, 집 지을 때 많이 쓰는 나무들이다.


  이렇게 쓰고 나니 우리 땅에서 자라는 나무는 모두 쓸 만한 게 없는 것처럼 되어 버렸는데 절대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의 숨겨진 보물 느티나무가 있다. 소나무와 함께 건축재로도 많이 쓰였지만 무엇보다도 가구재로 많이 쓰였다. 은행나무, 오리나무, 물푸레나무, 호두나무, 감나무 등등 용도에 맞게 알뜰하게 써왔고 지금도 쓰고 있다. 참나무도 진정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다. 숯 재료로 참나무만한 것이 없다. 참나무로 만들어서 ‘참숯’이겠지만 참나무 숯은 숯 중의 최고이니 이런 이름을 가질 만도 하다. 그리고 표고버섯을 재배할 때 꼭 필요한 나무이기도 하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참숯, 그 불빛이 너무 예뻐 고기 대신 붉은 참숯을 먹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사정이 이렇다면 우리는 비싼 나무를 죄다 수입해서 써야 하는 것일까? ‘고급 원목가구’라고 불리는 것들은 오크, 애시, 월넛 등을 수입해서 만들고 있으니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사실 이 셋은 순서대로 참나무, 물푸레나무, 호두나무여서 국내에도 있지만 가구재로 쓸 만한 정도가 아니다. 그럼 ‘고급’을 뺀 ‘원목가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이것 역시 고무나무를 비롯한 각종 나무를 값싸게 수입해서 해결하고 있다. 어쨌든 ‘원목’을 썼으니 ‘진짜 나무’인 것은 분명하다.


  참나무, 아니 진짜 나무가 아닌 나무는 안 되는 것일까? 쇠나 플라스틱 등 정말 나무가 아닌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무는 나무이되 원목이 아닌 나무 말이다. 사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이런 나무가 더 많다. 나무를 길게, 혹은 조각조각 이어 붙인 집성목도 있고, 나무를 무 깎듯이 얇게 켜서 겹쳐 만든 합판도 있다. 여기까진 그래도 나무의 모습이지만 나무를 잘게 부숴서 접착제와 혼합해서 만든 파티클 보드(Particle Board)도 있다. 더 심하게는 나무의 섬유만 뽑은 뒤 접착제로 반죽해 만든 MDF도 있다.


왼쪽부터 파티클보드, 합판, MDF, 다들 진짜를 표방한 가짜 나무이지만 나무가 주된 재료이기는 하다.

  주변의 가구를 한 번 둘러보라. 판재의 넓은 면은 진짜 나무가 틀림없는데 측면을 보니 여러 겹을 켜켜이 쌓아 놓은 것이 보이는가? 표면의 색과 결을 보면 진짜 나무 같은데 마구리면을 보면 결이 이어지지 않은 것이 있는가? 진짜 나무인 줄 알았는데 어쩌다 긁어 보니 겉과 속이 다른 것이 있었는가? 그렇다, 원목이 아닌 가짜 나무다. 층이 보이는 것은 합판이고 마구리가 생뚱맞은 것은 파티클 보드나 MDF에 얇은 무늬목이나 합성된 필름을 씌운 것이다.


  속았다는 생각이 드는가? 아니다.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 이런 ‘가짜 나무’ 덕분에 우리는 ‘나무’로 만든 물건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원목’이라 불리지는 않지만 나무로 만든 것은 분명하다. 부수거나 섬유를 뽑아낼 나무마저 없으면 우리는 플라스틱이나 금속으로 된 가구를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가구나 다른 용품으로 쓰기에 이만큼 적당한 물성을 가진 소재가 없다. 게다가 자유자재로 넓고, 두껍고, 복잡한 모양으로 만들 수 있다. 과장을 보탠다면 이런 가짜 나무가 없었다면 우리는 방바닥에 그릇을 놓고 밥을 먹고, 엎드려서 책을 읽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심지어는 가짜 덕분에 진짜를 쓸 수 있는 것이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나무로 된 물건을 원한다고 해서 죄다 진짜 나무로 만든다면 이 세상의 나무는 남아날 수가 없다. 아니면 아주 비싼 값에 써야 하거나 소수의 사람만이 쓰게 될 것이다. 가짜 나무로 만든 나무 제품이 있기에 진짜 나무로 만든 나무 제품도 우리 곁에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속았다고 분노할 것이 아니라 외려 감사해야 한다.


  경제, 혹은 경영에서 논하는 법칙 중에 ‘파레토의 법칙’과 ‘롱테일의 법칙’이 있다. 어떤 집단의 80%의 성과는 그 집단의 20%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 파레토의 법칙이다. 반면에 80%의 사소한 다수가 20%의 핵심 소수보다 뛰어난 가치를 창출해 낸다는 것이 롱테일의 법칙이다. 상반된 법칙인데 아무래도 롱테일의 법칙에 더 마음이 끌린다.


  쓸모없어서 잡목으로 여겨지는 80%의 나무 덕에 20%의 나무가 가치 있는 나무로 여겨진다. 가짜 나무 혹은 종이 등으로 만들어지거나 땔감으로 쓰일 80%의 나무가 없었다면 20%의 나무마저도 이렇게 쓰일지도 모른다. 가짜 나무로 만든 80%의 가구 덕에 20%의 진짜 나무로 만든 가구가 만들어질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잡목은 결코 잡목이 아니다. 특별한 용도로만 나무를 바라보는 사람에게 잡목일지 몰라도 우리 모두의 쓰임새로 보면 유용한 나무다.


  나무 중의 나무라는 뜻의 참나무란 이름을 받았지만 잡목 취급을 받는 것처럼 하나하나가 소중한 존재로 태어났는데 스스로 꼬리로 여기거나 꼬리 취급을 받는 일이 많다. 참나무는 목수나 공예가의 눈에는 쓸데없는 나무일 수는 있다. 그러나 육즙이 완벽하게 갇힌 고소한 고기를 원하는 이에게는 참숯으로 바뀐다. 참나무는 여전히 참나무인 것이다. 설사 80%의 꼬리에 속하는 나무여도 상관없다. 이 꼬리에 있는 나무 덕에 머리에 있는 나무도 살아남을 수 있다.


  친한 이들과 산에 가서 진짜 나무인 참나무를 다시 한번 보시기 바란다. 참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모른다고 하면 안 된다. 가장 흔하게 있는, 그래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나무가 참나무이니까. 참나무를 발견하면 이 ‘가짜 잡목’에 감사를 표한 후 자신과 주위도 둘러보시기 바란다. 늘 거울에서 보던 나와, 주변에서 늘 보던 이들이 진짜 사람, 참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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