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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보련 Apr 02. 2021

좋니, 이런 내가?

<첼로를 사랑하는 목수 -나무02>

  벌(Burl), 컬(Curl), 스폴팅(Spalting), 어쩔 수 없이 시작부터 영어 단어를 쏟아놓게 된다. 나무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특별한 나무들이다.  나무 자체의 색과 결만으로도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지만 이런 종류의 나무로는 훨씬 더 화려하고 멋진 작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흔한 소재가 아니어서 구하기도 어렵고 값도 비싼 편이다. 영어로 써 놓으니 좀 있어 보이지만 우리말로 바꾸면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다. 차례로 ‘혹, 주름, 곰팡이’가 된다.


벌(burl), 나무의 혹 또는 암덩어리다.
컬(curl), 나무 스스로의 무게에 짓눌린 주름이다.


스폴팅(spolting), 물이 스며든 뒤 곰팡이가 슬어 남긴 흔적이다.


  벌은 나무에 생긴 커다란 혹이다. 나무가 자라나는 과정에 상처를 입거나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이상 증세가 나타난다. 줄기가 굵어지고 키가 커지는 것이 아니라 이 부위가 부풀어 오른다. 그 과정에서 특이한 색, 결, 무늬 등이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으로 치면 뭘까? 조금 끔찍해 보일 수도 있어 ‘혹’이라고 했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암’이다. 생기지 말아야 할 것이 생겨 제멋대로 자라난. 나무의 암이다. 


  컬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여성들의 곱슬머리다. 자연적으로는 잘 안 되니 미용실에 가서 비싼 돈을 내고 아주 센 약으로 머리를 동글동글한 물결로 만드는 그것이다. 이게 나무에도 생기는데 그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컬은 주로 오래되고 덩치가 큰 나무의 아래 둥치에 생긴다. 나무가 자라나는 것은 새로운 세포가 생겨나는 것이다. 기후가 좋을 때 급격하게 생겨난 세포들이 나무 스스로의 무게에 짓눌리게 되면서 줄기의 직각 방향으로 줄무늬가 생긴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생기는 주름처럼.


  스폴팅은 죽거나 살아 있더라도 일부가 손상된 나무에서 나타난다. 나무에 물이 스며들면 곰팡이가 생장하기 좋은 상태가 된다. 이렇게 물기를 타고 들어간 곰팡이가 나무를 양분 삼아 자란다. 그 과정에서 나무와 화학 작용을 일으켜 묘한 색과 무늬를 남긴다. 먹을 것이 떨어지면 곰팡이는 사라지고 그 뒤에 푸석해진 나무와 죽은 곰팡이의 흔적이 현란하게 남는 것이다. 외과적으로 말하면 상처의 흔적이고 내과적으로 말하면 중병을 앓고 난 증거이다.


  벌은 비정상적으로 자라나는 조직인만큼 매우 귀하다. 그러나 상상을 초월하는 현란한 무늬 때문에 공예가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나무는 보통 부피로 계산해서 값을 따지는데 벌은 무게로 계산을 한다. 모양이 불규칙해 부피를 계산하기 어려워서이기도 하지만 작은 조각이라도 모두 가치가 있으니 무게로 계산을 한다. 무늬와 색이 좋은 것은 아이 손바닥 크기도 수십만 원이 넘는다.


  컬은 현악기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꽤나 익숙하다. 바이올린, 첼로 등의 뒤판은 메이플, 즉 단풍나무로 만든다. 뒤판을 보면 세로 방향으로는 본래의 결이 있는데 가로 방향으로도 줄무늬가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무늬가 호랑이 가죽 같다고 해서 호피무늬라고 하기도 하고 불꽃이 일렁이는 듯해서 불꽃무늬라고 하기도 한다. 바이올린이나 첼로와 같은 현악기에서 스프러스(가문비나무)로 만드는 앞판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단풍나무다. 꽤나 눈길을 끄는 것이 이 무늬라 다들 이 나무의 컬을 유심히 본다. 단풍나무는 흔한 편이지만 컬이 촘촘하고 일정한 것은 드물기 때문에  꽤나 비싸다.


메이플로 만든 바이올린 뒤판, 세로 방향으로 본래의 결이 있지만 가로 방향의 컬이 눈길을 끈다.


  스폴팅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매우 낯설다. 곰팡이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데 곰팡이가 핀 나무를 좋아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곰팡이 때문에 푸석해진 상태라 가구를 만드는 데는 쓰일 수 없다. 크고 넓은 판재나 굵은 각재를 만들기도 어렵다. 하지만 소품을 만드는 이들에게는 아주 좋은 소재이다. 푸석해진 사이로 염색액이나 레진(수지)을 침투시키기도 좋아 더 화려하고 단단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 나무는 나무 펜을 만드는 이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는다. 어차피 곰팡이와 나무의 합작품이니 습기가 많은 곳에 두어 일부러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귀한 대접을 받는 벌, 컬, 스폴팅이지만 사람과 관련을 지으면 슬퍼진다. 앞에서 잠깐 썼듯이 벌은 혹 또는 암이다. 의학이 발전하기는 했지만 암은 아직도 바로 죽음이 연상되는 병이다. 주름 또한 슬프다. 피부가 노화되면 나타나는 것이 주름이지만 흔히 삶의 무게와 관련을 짓는다. 나무와 달리 나이가 들면서 몸은 가벼워지지만 살아온 세월의 무게에 짓눌리면서 얼굴과 온몸에 주름이 생긴다. 곰팡이는 또 어떤가? 여름만 되면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는 무좀이 바로 곰팡이에 의한 것이다. 어느 것 하나 반가울 게 없다.


  사람으로 치면 반가울 게 없는 혹, 주름, 곰팡이인데 나무의 그것은 무척이나 귀한 존재가 된다. 죽은 나무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공예가 덕분이다. 나무를 키우는 사람의 처지에서는 곧게 쭉쭉 커 나가는 나무가 사랑스럽다. 혹, 주름, 곰팡이가 생긴 나무는 목재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 그러나 천대를 받을 수 있는 이런 나무를 가져다 공예가는 멋진 작품으로 승화를 시킨다. 늙고 병든 나무가 새로운 작품으로 다시 태어난다.


곰팡이가 남긴 흔적을 살려 만든 나무 그릇, 어떤 화가의 그림보다 화려하다.


  나이가 들면서 어쩔 수 없이 생기게 되는 병과 각종 노화 현상들. 암과 주름도 그중의 하나다. 가능하면 피해 보려고 애쓰지만 그래도 걸리게 되는 것이 암이다.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도 찾아오는 것이 주름이다. 더 나이가 들면 곰팡이처럼 피어오르는 기미나 검버섯도 시나브로 나타난다. 싫다. 죽음이 연상되니 싫고, 늙었다고 인정해야 하니 싫다. 건강한 나무처럼 위로, 그리고 옆으로 쑥쑥 자라던 시절을 뒤로 한 채 쪼그라들고 스러져야 할 운명이니 싫다.


  노래도 잘 만들고 음반도 잘 만드는 윤종신 씨가 만든 ‘좋니’란 노래가 있다. 특이한 제목이 눈길을 끌어서 들어보니 제목은 ‘좋니’인데 노래를 부를 때는 ‘좋으니’라고 해서 살짝 웃었던 노래다. 헤어진 애인에 대한 노래이지만 다른 울림으로 다가온다. 노래의 제목이 묻는다. ‘좋니?’라고. 누가 묻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좋냐고 묻기만 한다. 물음을 주인을 나무로 해 본다. 혹부리 나무, 주름 투성이 나무, 곰팡이 꽃이 핀 나무가 묻는다. ‘이런 내가 좋니?’라고. 공예가는 대답한다. 좋다고, 아주 좋다고. 


  주어를 ‘나’로 바꾸어 본다. ‘이런 내가 좋니?’라고. 대답을 고민할 필요도 없다. 싫다. 아주 많이. 거울을 자세히 본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머리를 자를 때 보여주는 거울도 잘 안 본다. 사진을 기꺼운 마음으로 찍어본 지가 언제인지는 더더욱 모르겠다. 공항을 통과하기 위해 억지로 찍은 사진이 전부인 듯하다. ‘좋니? 이런 네가?’에 대한 대답을 일찌감치 정해 버렸다. 혹, 주름, 곰팡이는 아니더라도 변해가는 모습들에 대해 사랑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확실한 듯하다.


  <가난한 날의 행복>을 쓴 김소운의 수필 중에 <피딴 문답>이 생각나기도 한다. 외래어 표기법에 맞게 쓰면 ‘피단(皮蛋)’인데 중국 음식점에 냉채를 시키면 나오는 계란 비슷한데 검고 투명한 그것이다. 흙, 재, 소금, 석회, 쌀겨를 이긴 것으로 알을 싸서 두 달 이상 삭힌 것인데 썩지 않은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싱싱한 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썩은 것도 아닌 알이 독특한 풍미를 낸다.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벌, 그리고 컬과 스폴팅이 든 나무와 마찬가지이기도 하다.


피단 혹은 피딴, 결코 썩은 것이 아니다.


  이런 나무는 집을 짓는 목수들, 즉 대목들에게는 사랑을 받을 수 없다. 크기가 별로 크지 않고 모양도 제멋대로인 벌은 아예 집을 짓는 재목으로 쓸 수 없다. 컬은 큰 나무에서 생기니 쓸 수도 있지만 쓸데없이 단단해 다루기 어려우니 환영을 못 받는다. 곰팡이가 핀 나무는 푸석해서 집을 지었다가는 큰일 나다. 그러나 공예가는 다르다. 벌의 어지러운 그 무늬를, 짓눌린 컬의 그 주름을, 곰삭고 남은 그 색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더 아름답게 만들 방법을 고민한다. 버려질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도 모자라 더 특별한 나무로 탈바꿈시킨다.


  자존감이 특별히 높은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면 ‘내가 좋니?’하고 스스로 묻고는 그렇다고 대답할 이가 많지 않을 듯하다. 그런데 이런 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늘 좋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 어른이 돼서 어쩌다 만나 가정을 꾸린 뒤 좋은 사람일 거라고 여전히 믿고 사는 이가 있다. 선택권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나의 아이로 태어나 나를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라고 여겼던 아이도 있다. 이런 나를 내가 싫다고 하면 나를 좋다고 하는 이들이 민망해질 테니 그래선 안 될 듯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새벽까지도 초등학교 5학년 어린아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할머니를 끌어안고 잤다. 중풍 때문에 10년 넘게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였는데도 마냥 좋았다. 가끔씩은 요강에 앉혀 드려야 하고 화장실까지 따라가야 했는데도 그저 좋았다. 그런 내게 어머니는 때때로 물으셨다. ‘좋니?’라고. 나는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때는 할머니가 제일 좋았다.


  버려질 나무를 가져다 쓰는 목수의 눈이 필요하다. 내 눈이 아닌 주위 사람의 눈으로 나를 다시 바라봐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늙어가는 모습이 나는 싫다. 나에게는 묻지 못해도 주변의 누군가에게 물을 수 있으면 좋겠다. 얼굴에 철판을 깔거나 심장을 강철로 바꾸지 않으면 웬만해서는 묻지 못할 듯하다. 자신도 싫어하는 존재를 좋아하냐고 묻기는 어렵다. 그래도 언젠가는 나 자신에게, 그리고 주변의 누군가에게 묻고 싶다.

“좋니, 이런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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