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와 소로리 볍씨
만약 지금 아틀란티스가 발견된다면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두 번째 건축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틀란티스는 발견되지 않았고 따라서 이것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이것은 통념적 역사관을 바꿔놓았을 뿐 아니라 모든 연구가 다시 시작되게 할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어떤 건축물이 떠오르는가?
정답은 튀르키예의 남동쪽 시리아와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이다. 이 이름이 낯선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한 번쯤 들어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역사를 배울 때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의 연대를 배우며 도구가 발달함에 따라 수렵, 채집을 하던 인류가 농업을 할 수 있게 됨으로써 모여 살기 시작했다고 배웠다.
신석기시대가 되면서 입체적인 다양한 도구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상당한 인류의 생활방식이 변화하였음을 보여준다. 수렵과 채집을 하던 생활에서 슬슬 집단을 형성하고 농업과 목축을 시작하는 것을 알게 하는 대 변혁과 같은 것이었다.
농업으로 인해 인류는 고정적인 거주지를 갖게 되었고, 그 거주지는 도시 문명의 발전으로 커져나갔다. 이것이 의례 우리가 알고 있는 농경 사회에 관한 지식이다.
하지만 1996년 클라우스 슈미트(Klaus Schmidt)가 이끄는 독일의 발굴단이 2014년까지 발굴한 튀르키예의 괴베클리 테페에 의해 이 모든 이야기가 무너져 버리고 만다.
괴베클리 테페는 발굴을 할수록 건축 추정연대가 올라가더니 15,000년 전으로 추정되었다. 하지만 구석기시대의 흔적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정교한 건축물에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기존 학설에 따르면 인류는 수렵과 채집 생활을 하다가 도구가 발달하며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시작했고, 그 이후에 종교가 생겨났다고 알고 있었다.
신석기 시작→농경 시작→가축 사육→고대국가 형성→각 제도와 종교의 발전
하지만 괴베클리 테페는 수렵인들이 모여서 거대한 종교시설을 건설했고(심지어 이 건축물은 대규모의 노동력과 높은 기술력을 갖추었다.) 그로 인해 그 주변 멀리에서부터 정착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인류의 문명이 농경생활이 아니라 종교 때문이라는 엄청난 반전을 맞게 된다.
하지만 놀라운 점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괴베클리 테페는 만들어진 후, 다시 오랜 시간에 걸쳐 흙으로 메워졌다. 현재 전체의 약 10% 정도에 유적만 발굴됐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더 오랜 과거로 올라갈수록 건축기술이 더 발전했다는 것을 발견하며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채 발굴이 다 이뤄지지 않았음에도 괴베클리 테페는 2018년 유네스코에 등재된다.
괴베클리 테페의 유적에는 200여 개의 돌기둥과 돌담을 원형을 세워서 제단으로 만든 것이 있는데 돌기둥은 정교한 석조 기술을 사용하여 T자형으로 조각해 세웠고, 이 돌기둥 한 개당 무개는 보통 10톤이고 큰 것은 50톤이 넘는 것도 있었다. 이런 돌기둥을 세우기 위해서는 상당한 인원이 필요했음은 자명한 일이다. 전문가들은 최고 500여 명이 필요했을 것으로 본다.
또 대단한 이야기를 하자면 영국의 에든버러대학 공과대학의 마틴 스윗먼 박사 연구진은 괴베클리 테페에 돌기둥에 새겨진 문양에서 오래된 태양력을 발견했다. 상당히 긴 설명과 함께 고대의 기술과 천문학적 지식이 앞섰음을 피력하고 있다.
기둥의 넓은 면에 그려진 동물들은 후대 그리스의 별자리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내용은 꽤나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때문에 구석기와 신석기를 떠올릴 때 무지한 원시인만 떠올리는 우리의 편견을 깨야할 때가 온 것이다.
세계적으로도 의미 있는 괴베클리 테페의 발굴은 아직도 초입단계이다. 따라서 발굴이 될수록 어떤 사실이 밝혀질지 알 수없어 더욱 신비로운 것이다.
과연 어떻게 도시보다 종교가 먼저 사람을 모을 수 있었는지 밝힐 수 있을지 앞으로의 발굴이 기대된다.
인류의 문명이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지 어느 날 갑자기 어떻게 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태 호모 사피엔스의 등장을 배우고 5천 년 전의 4대 문명을 배웠다. 이것은 제국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일부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을 미개하다고 평가하는 그들의 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많은 역사들이 새로운 시각으로 쓰여야 할 것이다.
그것의 일례로 우리나라에서 1997년에 충북 소로리에서 발견된 볍씨를 들 수 있다. 이 작은 볍씨 몇 톨이 무슨 의미이겠는가 싶겠지만 이 전까지만 해도 벼 재배는 12,000년 전 중국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소로리의 볍씨가 발견되고 방사성연대 측정을 통하여 17,000년의 것으로 밝혀졌다. 물론 이것을 야생의 볍씨라고 하는 이야기도 나왔으나 이것은 엄연히 재배를 위한 볍씨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리고 현재는 소로리 볍씨에서 ‘Oryza sative coreaca(오리자 사티바 코레아카)’, ‘한국의 고대벼’라는 학명도 부여받았다.
이 볍씨가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쌀농사를 먼저 지었다는 것을 넘어선다. 벼농사는 씨족사회의 발전과 연결된다. 논을 만들고 물을 대는 등의 수많은 사람과의 협력이 필요하다. 또 지금 남아있는 형태이기도 한 두레와 품앗이 등 대규모 인력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아 마을, 또는 국가가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알려지지 않았지만 황하문명 말고도 한반도에 다른 문명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음이다.
역사라는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발굴이 될수록 다양한 관점과 유연한 시각으로 바라볼 때 3차원으로 보인다. 여태까지 우리는 역사가들이 자신들의 사상에 맞춰 짜준 2차원의 역사를 보고 있지는 않는지 의문이다.
<참고문헌>
Sweatman, M. B. (2024). Representations of calendars and time at Göbekli Tepe and Karahan Tepe support an astronomical interpretation of their symbolism. Time and Mind, 1-57. https://doi.org/10.1080/1751696X.2024.23738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