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추를 씻으며 상추만 생각할 수 있다면 톱니바퀴가 맞물려 잘 돌아가듯 인생이 잘 풀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마주한 시간에 집중한다면 신문지에 말아 두었던 상추를 사랑으로 다듬고 씻어, 물기 먹은 상추가 되살아나 기분 좋게 식탁 위에 앉아 있는 모습에 맞절을 하며 식사를 했을 상상.
상해버린 부분을 잘라내며 오늘 늦어서 가지 못한 전시회에 대한 미련과 그렇다면 언제가 좋겠냐는 물음을 상추에 대고 하고 있다.
물러진 부분만 가위로 잘라내기도 하지만 과감하게 멀쩡한 부분이 반이 넘는 걸 던져버리기도 하며 '이렇게 살 거야' 해본다.
그래 이렇게 살았다면 덜 힘들었을 텐데...
어쩌면 상추를 씻으며 할 말이 이거 외엔 없지 않겠나.
너는 어쩌다 이렇게 시든 거냐, 미안하다 너무 오래 둬서, 왜 나한테 온 거냐...
이런 말은 너무 무책임하잖아.
아니 다 나한테 하는 말 같잖아.
한여름엔 상추와 고추 등 야채류를 주는 사람이 한 번에 몰려 당해내지 못할 때가 있다.
마음 써서 줬는데 열심히 먹어야지 생각은 하지만 상추가 생기면 고기가 생각나고 쌈장을 만들고 야채를 씻어야 하고 일이 늘어나기 마련이라...
주방일에 쏟는 시간을 줄이겠다는 계획과 생긴 건 어떻게든 해 먹어야 하는 철저한 성격이 부딪치고 있다.
어느 쪽이든 이겨야 결판이 날 텐데...
오가는 이웃에게 조금씩 덜어 주니 정리가 되는 듯했으나 어제 보스턴댁이 아삭이고추라며 전해주고 서둘러 가신다. 너무 감사했지만 요즘 고추를 하도 많이 먹어서 좀 질리는 것 같아 과감하게 이웃을 줄까 생각했다.
그래도 맛은 한번 봐야지 싶어 무섭게 자란 아삭이고추를 한입 베어 물었는데 입안에 물이 가득 고인다.
이건 너무 맛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