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쓰던 글을 이어서 쓰다가 번뜩 정신이 나서 마침표도 못 찍고 바로 나왔다.
글은 신선해야 한다고 말한 지가 몇 달도 안돼서 또 다 식은 커피를 탓하고 바다 뷰를 내일 일정으로 미루려 한다.
바다에 몸을 적시진 못해도 발밑까지 와서 하는 얘기는 들어줘야 하지 않겠나.
잘 따르는 강아지가 측은 대듯 발을 간지럽히는 게 사랑스럽다.
늘 먼저 달려오는 파도는 지치지 않던 청춘의 사랑을 떠올리게 한다.
조금 더 사랑할걸…
그렇게 부서지고도 다시 밀려와 사랑타령이다.
애월의 번화한 카페 밀집지역을 살짝 벗어나 안팎으로 파도와 대면할 수 있는 감성 충만 인더스터리얼 스타일 카페 ‘레이지펌프’를 발견했다.
오래된 양식 펌프장을 개조해 만들어진 녹슬 대로 녹슮이 그대로 작품으로 선택된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녹슬었지만 더럽지 않게, 오래되었지만 지난 이야기 보단 오늘을 말하는…
바다가 아니, 파도가 충분히 다가올 수 있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배터리가 반쯤 남은 아이패드를 급한 마음으로 펴고 취조를 하는 심정으로 파도를 응시했다.
말이 없다.
….
이렇게 자리 잡고 앉으면 무슨 말이라도 해줄 줄 알았다.
글이 술술 써져서 이번 여정에 두 권의 브런치 북을 만들어 갈 것도 같았다.
내 집이라도 된 양 자리를 옮겨가며 파도를 달래볼 심산이다.
괜히 미안해진다.
뭐라도 건져 보겠다고 이러는 게 부자연스럽다는 걸 깨닫고 보란 듯이 아이패드를 덮어버렸다.
카페 레이지펌프 2층에 모르지만 익숙한 음악이 흐르고 있다.
잭 디조네트(Jack De Johnette)의 재즈에 심취한 바다는 해가 질 때까지 리듬만 타고 있다.
친구가 제공해준 열흘간의 숙소와 자동차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애월에 머물게 되었는데 며칠이 지나도 적응이 어렵다.
뭐가 불편하다고 딱히 말하기도 어렵지만 제주가 맞지 않나 보다는 생각만 드는 며칠이었다.
바다가 훤히 보이며 발밑에서 속삭이는 파도의 말을 귀담아들을 수 있는 카페가 많다는 이유만으로는 여행이 만족스러울 수는 없단 말이다.
여행이 아름답기만 할 수도 없을뿐더러 일부 감탄할만한 풍경이 감동이었다 해도 무덥고 습한 날씨는 그 모든 것이 필요 없다는 지경까지 가게 한다.
말하기 참 불편한 진실이지만 벌레가 너무 무서운 나로서는 충격적인 사건이 있던 날이었다.
소리가 났고 매미만 한 바퀴벌레가 방안 입구 근처에 어슬렁거리고 있는 걸 목격하고 말았다.
왜 하필 내 앞에 그 시간에...
우리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쾌적하지 않은 여름 여행일지라도, 맞지 않는 음식을 먹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더라도, 숙소 밖 도로의 소음이 바다 풍경을 집어삼켰다 해도 모두 모두 묵인하고 나름의 한적한 여행을 즐길 수 있었을지 모른다.
까다롭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흉악한 사건이 벌어졌을 거라고 생각할만한 비명을 지르며 혼자 몸서리치는 밤을 보내야 하는 유난 떠는 캐릭터가 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냐고.
그렇게 나의 제주도망여행은 벌칙이라도 받는 것처럼 고통이 따랐지만 죄지은 만큼 형벌을 받겠다는 마음을 품은 정신 돌아온 죄수처럼 끝까지 버텨냈어야 했다.
내가 선망하는 인간상은 지구 상의 모든 생물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며 벌레도 손으로 교감하는 사람이다.
힘도 엄청 세서 지치지 않고 남의 일을 도울 수 있고 뜨거운 태양 아래 오래도록 아이들과 뛰어놀아도 그을린 얼굴에 한가득 미소를 잃지 않는...
그래... 누군들 까다롭고 싶었겠냐고.
시각장애인이 청각이 발달했듯이 시각이 예민하면 청각이 둔하던지, 후각이 예민하면 촉각이라도 둔하던지 해야 공평한 거 아닌가?
모든 감각이 날뛰는 통에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는 시간을 보내고 말았다.
예민하다는 게 때로는 까칠하다는 평가로 전락할 때가 있지만 그 예민이 맞아 들어갔을 때는 편하면서도 창의적인 사람으로 호감도가 올라가기도 한다.
나의 예민함은 취향일 뿐이다.
좋은걸 분명하게 구별할 줄 아는 감각을 타고났다는 건 한 가지 기술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 아닐까?
가지고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본다.
그러니 한결 기분이 좋아진다.
편안한 시간은 여행의 거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찾아왔다.
벌레가 활동하지 못하도록 불을 켜고 잤고 틈새마다 치약을 짜서 발라 두었다.
효력은 잘 모른다. 그냥 감으로 치약을 싫어할 것 같고 흔한 게 치약이다 보니 해봤는데 그 이후로 나오지 않았다. 방을 제공해준 친구에게 미안해서 더는 말하지 못하고 형량을 채워나갔다.
스마트폰 카메라 보정 필터를 사용하지 않고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내는 사진이 찍히는 제주 애월 카페에서 매일 꼴깍꼴깍 해를 삼키는 바다를 보고 있노라니 조급한 마음이 가라앉는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이런 마음, 맛있는 거 좋아하는 마음이랑 같은 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