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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한김작가 Aug 22. 2022

귀인을 알아보는 눈

귀인방명록


어떤 날...

귀인의 나라에 던져진 인형처럼 휘둥그레진 눈을 감지 못하고 하루를 보내는 날이 있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온갖 사물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명랑한 은둔을 노래하다가 적당한 사교를 위해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 스칠 때 긴 도망여행을 시작한다.

신기하게도 그럴 때 기다렸다는 듯이 귀인이 눈앞에 서 있다.

아니 움직이는 곳곳에 귀인이 대기 중이었던 것도 같다.

스스로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가득할 때 귀인을 기다린다.

누군가 내 손을 강제로 잡고라도 일으켜주길 바랄 때 손을 잡아주는 그 사람이 귀인이길 바란다.

방문을 열고 나가면 그들은 이제야 나왔냐고 반색을 한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던 귀인이 말이다.



얼마 전 다녀온 열흘 정도의 제주여행에서 귀인들이 분포되어 있는 곳을 발견했다.

벌레와 습한 날씨, 도로의 소음과 시름하며 보낸 일주일은 혼자만의 사투였다. 

오로지 잠만을 위해 이용하면 될 숙소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이겨내겠다는 미련한 오기 탓이었다.

간간히 외출을 했지만 그 방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주일은 몸까지 아프게 했다.

일주일쯤 지나던 날 어디든 가야겠다는 마음으로 관광객 행세를 하며 애월의 카페촌 주변을 땀을 흘리며 어슬렁거리다가 지쳐서 결국 차를 타고 사람들이 없는 골목으로 이동했다.

한두 번 들렀었던 '라녹'이라는 이름의 한적한 카페에 들어갔다.

요란한 장식이나 화려한 뷰도 없지만 고요한 풍경과 손님을 위한 배려가 곳곳에 숨어 있는, 

수수해 보이지만 뚜렷한 빛이 나는 눈빛을 갖은 주인인지 알바인지 싶은 귀여운 여자가 있다.

메인 메뉴에 우크라이나식 스튜가 눈에 들어와 더 반가웠다. 

나도 스튜는 좀 하는데...

다른 카페에서 보지 못했던 케이크의 모양새도 호기심을 자극했는데 독일인 남편이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커피와 함께 나오는 우크라이나식 스튜 세트를 주문해서 먹었다.

비트와 생파슬리를 듬뿍 넣어서 독특한 향이 났고 흑돼지를 사용한 점도 독특했다.

내가 만드는 스튜에는 바질과 정향, 샐러리가 많이 들어가고 소고기 사태를 사용한다.

라녹의 스튜는 처음 접하는 맛이어서 바로 적응되는 맛은 아니었지만 여행 다녀온 기분이 났다.

독일인 남편이 만드는 케이크를 먹어보지 못한 게 아쉬워서 아른거린다.

카페 다녀온 자랑을 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평화로웠고 기분이 좋아졌던 그 시간은 귀인들 덕이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애월에서 유명한 피지 버거를 두 가지 맛을 보기 위해 두 개 주문했다는 말을 하자마자 작은 체구의 카페 주인인 그녀는 자기도 두 개를 먹는다고 바로 받아치며 감자튀김도 주문하셨냐고 저는 그냥 햄버거만 두 개 먹는데 두 개는 먹어야 양이 찬다고 했다.

두 개 다 먹은 게 마음에 좀 걸렸었는데 맞장구를 알아서 쳐주니 웃기기도 하고 대화에 리듬이 더해졌다.

무표정으로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이 당차 보이고 낯설지 않았다.

스튜에 관한 이야기, 독일 이야기...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다시 만나야 할 것 같다.



좋아진 기분으로 카페를 나와서 애월읍 번화가를 둘러보다가 수상한 편집샵을 발견했다.

인디언핑크로 칠해진 낡은 건물을 잘 들여다보니  '봉구러니'라고 적혀 있다.

간판인가 보다.

덜그럭거릴 것 같이 허술해 보이는 미닫이 유리문에 들어와도 좋다고 손글씨 메모가 붙어 있다. 

허락해주니 감사하다고 고개가 숙여지는걸 간신히 참았다.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들킨 것 같은 기분에 수줍은 듯 문을 열었다.

루이스 캐럴의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토끼굴로 굴러 떨어졌을 때 거실의 다리 세 개뿐인 테이블 위 병에 '이걸 마셔요'라고 적혀 있던 메모와 글씨체가 같은 것 같다.

손님처럼 보이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옛날 짜장면집에서 사용했던 것 같은 엽차 잔에 차를 따라준다. 

자기들도 손님이라면서...

뭐지? 이 기분, 귀인 스폿에서나 느끼던 이 묘한 편안함.

양갈래로 땋은 머리를 한 주인과 친구가 함께 발행한다는 봉구러니일보는 취향저격이어서 잠자고 있던 창작욕구에 부채질을 해댔다. 자신들의 일상에 곁들여진 정보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유명인의 말을 떠올리게 했다.

돈은 되지 않지만 재미로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방긋방긋 웃으며...



두근대는 심장을 추스리기도 전에 새로운 귀인이 등장한다.

우연히 지나가던 애월의 책방지기가 오늘 저녁 있을 이상한 다과회의 회원을 긴급 모집한다는 것이다.

아아... 내가 꾸며대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저녁에 제주말로 하는 북콘서트가 있는데 자기가 차가 없어서 함께 가줘야 한다고 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으면서도 알 것도 같아서 납치당하듯 따라나섰다.

할머니가 사시던 백 년 된 가옥에 꾸민 동네책방 '몽캐는책고팡'이었다.

숙소에 묻혀 있을 때 동네책방을 검색하다가 어디가 좋을지 결정을 못해서 포기했던 터였다.

제주 토박이가 제주어로 하는 북콘서트에 참여한다는 것은 여행자로서 더없이 알찬 일이었다.

모기가 많은 저녁에 문을 활짝 열고 진행하는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건네 준 이불을 뒤집어쓰고 모기를 피해 흥미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여행 중에 한번 더 만날 기회가 있었고 책방지기가 이상한 다과회에 적격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더 마음에 들었다.

여기도 귀인 스폿이 확실했다.


귀인 스폿이 밀집해 있는 곳을 발견한 건 고작 하루만의 일이었다.

방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반겨주었고 움츠려 있던 몸과 호기심은 다시 가동되기 시작했다.

귀인을 보는 기술이 생긴 걸까? 일생에 귀인은 한 번이나 올까 말까 한 것 아닌가?

어쩌면 귀인을 보는 눈은 마음에 있는 것이었나 보다.

귀인이 보이는 눈이 열리던 날 지나치던 귀인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애월의 귀인 스폿에 깃발을 꽃은 지도라도 만들어봐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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