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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한김작가 Sep 17. 2022

여름을 싫어한다는 건 아니다

귀인방명록


여름을 싫어하는 것이 죄라도 되는 것처럼 다른 계절을 좋아할 뿐이라고 돌려 말하게 된다.

자연의 섭리로 만들어진 한 부분을 싫어한다는 게 다분히 이기적이고 가벼워 보인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니까.

그렇다 해도 떠나려 하는 귀인들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멍하게 보내버린 핑계를 다른 데서 찾기는 어렵기 때문에 여름에 대고 화풀이를 하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정신을 집중하고 에너지를 발산하려 해도 쭈그러지는 모양새는 체질상 어쩔 수가 없다.



언제부터인가 경제력에 큰 상관없이, 어쩌면 어릴 때보다 어려운 사정임에도 불구하고 시원한 여름을 보내게 된 것은 전기요금에 부담이 덜 가는 인버터 방식의 에어컨 덕분이기도 할 것이며 소비에 무뎌진 생활방식이 던져준 초콜릿 조각쯤 되지 않을까.

또한 인생 좀 살다 보니 어떻게 하면 짜증 없이 컨디션을 유지하고 후회할만한 사건을 만들지 않을 수 있는지 터득하게 된다.

여름에 맥을 못 추는 게 의지가 약해서랄지 예민한 성격 탓이라고 생각했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바다를 사랑하는 자만이 청춘의 자격이 있다는 생각에 나와는 태생부터 다른 이들이 부러웠었다.

칙칙한 그늘 아래 서 있을 때나 정신이 나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자책으로 자신을 어둠의 자식 정도로 치부했으니까.

채소나 과일은 아니지만 잘 자라는 계절, 고개를 내밀고 웃을 수 있는 시기는 다를 수 있지 않겠나.

이런 생각을 한지 좀 되긴 했다.

어쩌면 인버터 방식의 저렴한 전기요금을 내도 되는 에어컨이 출시된 시기와 맞물릴 수도 있겠다.

에어컨으로 이어지는 동선을 따라 생성되는 귀인과의 접점이 예전과는 다른 색으로 표시되고 있지만 여름은 가을로 가는 길목일 뿐 직접적인 관계는 맺고 싶지 않다.

좋아하는 곡식과 먹거리가 여름에 의해 생산되는 점에 무한한 감사를 표해야 한다고 지적하는 이가 있겠다.

누가 모르나, 세상 일에 감사함이라는 게 매일 감사 일기를 쓰는 일처럼 구차하게 찾아내야 하는 일은 아니라서 기본은 두고 지금만 생각하고 싶다는 거다.

가난한 자에게도 은혜를 베푸는 인버터 방식의 에어컨 아래에서도 여름에 겪어야 하는 신체의 불편함을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렵다.

에어컨의 강제적 환경에 머리는 띵해지고 몸은 무거워져 착해진 듯했던 성질이 발작을 한다.

잘 견디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틈에선가 감추고 있던 어두운 꼬리를 내밀며 특유의 성질머리를 보여준다.


귀인도 떠난다.

몸만 떠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떠나 이제는 잊히려 노력이라도 하는듯하다.

부모 자식으로 만난 연이 아니고서는 누구나 떠날 수 있다는 대비를 해야만 한다.

긴 장마로 끈적해진 책방 바닥이 싫어서 내게 오지 않는 거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귀인이 준비한 가방에 여비를 챙겨 보낼 마음을 먹어야 아름답지 않겠나.

가려고 했던 게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잠시 등을 보인 탓에 싸늘한 이별을 예감하고 되려 떠밀어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했는지도 모른다.

귀인이 떠나려 할 때, 그 역할을 다하고 떠나는 거라고 이해하는 듯 표정 지을 수 있다면 당장의 상실감은 견뎌낼 만한 것이 될 수 있다.

그거면 된다. 뒤야 어떻게 되든 모양새가 나쁘지 않은 이별로 마무리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인연을 약속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나만큼 나이를 먹은 여름이 이별만큼은 추하지 않게 허락한다.


떠나려 했던 게 아니었을지 모른다.

귀인이 필요했던 순간의 역할을 다했을 뿐.

우리는 다른 이유로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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