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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에반한건사랑이아니라성욕이다

by injury time

요즘 누군가에게 선물 받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다시 읽고 있다. 읽으면 읽을수록 대체 이렇게 거창한 사랑을 우리는 과연 해내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나 싶다. 이 책 리뷰 같은 것을 하기에는 아직 많은 것이 미숙하여 다른 분들의 리뷰로 차치하고, 오늘은 나의 '사랑의 기술'을 이야기하려 한다.


내가 자신 있게 사랑을 말할 수 있는 건 아마 자식일 거 같다. 자식에 대한 사랑은 추호도 거짓이 없고, 변할 거 같지도 않고,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만지고 있어도 만지고 싶고, 주물러 터뜨리고 싶을 만큼 사랑한다. 자식이 생기면서 비로소 사랑이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아냈다.


여기서, 댁의 남편은 뭔가? 하겠지만 난 AB형 성격이 문제인지 그에게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다. 자신이 없는 것도 문제다. 확실히 그를 사랑하는지 나 스스로 의심이 되고 변하지 않을 거라 장담도 못 한다. 물론 그는 나에게 수도 없이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쉽게 내뱉는 그의 사랑 고백도 사실은 믿지 못하겠다.


내가 많이 냉소적인가 보다. 그 역시 프롬님이 말하는 '사랑' 언저리도 따라가지 못하면서 이쯤 해서 사랑한다 말하면 맞겠지 싶어서 하는 말 같다. 학습되어진 사랑 고백 말이다. 물론 내가 그에게 사랑한다 말한 적도 있긴 하기만 그게 진심이었는지 책에 나온 구절처럼 '나의 생명을 그의 생명에 완전히 위임하는 결단의 행위'

아니었다.

내게 사랑은 그냥 성욕이지 싶다.


처음 사랑이라 느낀 남자는 여고시절 잘 생긴 물리선생님이었다. 입학식 때 그를 처음 보고 첫눈에 반해 3년 내내 쫓아다녔다. 그는 일곱 살 된 딸을 가진 유부남이었는데 정말 많이 좋아해서 그 어렵다는 물리시험은 항상 만점 맞곤 했다. 3학년 어느 날, 그 선생님의 마누라가 늦둥이로 아들을 낳았다는 벼락같은 소식을 들었다. 어린 여고생은 그의 여우 같은 마누라가 아기 낳은 시점에서 열 달 앞으로 날짜를 되짚어보며, 그때 우리 선생님이 그 창녀 같은 마누라랑 잤다는 말인가, 하면서 배신감과 억울함이 밀려와 한참을 울고 불고 했었다. 결국 얼마 후 선생님과 혼자만의 작별을 했던 기억이 있다. 한창 뜨거울 여고시절에 선생님을 흠모한 건 '사랑'이었을까? 아니다. 그냥 성욕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 후로도 첫눈에 반한 사람과 연애를 했고 '성숙하고 생산적이고 보호, 존경, 책임, 지식 같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여 결국 영원한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라는 프롬님의 훈화 말씀에도 나는 어리숙하게도 자주 사랑에 빠져버리곤 했다.

며칠 전 이른 오후에 운동을 갈려고 채비를 하고 나갔었다. 한참을 걷고 있는데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근무시간에 머리가 좀 아파서 바람 쐬러 차 끌고 돌아다닌다는 그는 갈 데도 없고 생각나는 사람도 나 밖에 없다며 우리 집 근처를 지나간다고 연락을 했다. 혹시 우연히 내가 나와 있다가 만나면 반가울 것 같다는 그의 말은 참 어처구니가 없다. 그렇게 생각나는 사람이 없을까, 어쩜 인간관계가 좁을까 싶었다. 결혼한 지 16년째인데 그는 아직도 나를 사랑하는 걸까?

그의 사랑고백을 다시 한번 되짚어본다. 난 그동안 사랑이란 단어를 성욕이라는 단어와 혼용해서 생각한 건 아니었을까?

우리가 더 이상 서로에게 성욕이 생기지 않으니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착각. 그러고 보니 그 옛날, 그도 나도 서로에게 첫눈에 반했던 것 같다. 이제부터는 남편의 사랑고백을 믿어보려 한다. 뭐가 됐든 사랑이건 성욕이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이자 화수분처럼 끝없이 새어 나오는 인간의 본성을 한번 믿어보려 한다. 내 사랑도, 그의 사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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