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4학년 졸업반이었고 꽤 교수님들에게 인정받는 학생이었다.조교님이 나랑 몇 명의 학생들을 불렀다. 방학 때부터 방송국 구성작가로 활동해 보라는 권유였다.
취업이 됐다는 것보다 그 많은 친구들 중에 내가 됐다는 게 나는 의기양양했다.
구성작가 일은 별거없었다.지금으로 치면 '생방송 좋은 아침' 같은 그런 정보 프로그램이었다.나는 매주 목요일 구성작가로 지정됐다. 매일매일 작가와PD가 한 팀으로 구성되어 총 5팀이굴러간다. 나는 나보다 열 살 많은 여자 피디와 한 팀이 되었다.ㅠ 그때만 해도 인터넷 검색 이런 게 제대로 안되는 시절이라 온갖 신문을 섭렵하며 아이템을 짜는 게 큰 어려움이었다.게다가 다른 팀이랑 겹치면 안 되니 아이템 선정이 제일 힘들었다.
어느 정도 방송국 일이 익숙해질 때쯤부터는 작가들끼리 어울리고 친하게 지냈다.PD들은 젊은 학생들이랑 같이 일하니 신선했는지 그들회식자리에 우리를 끼워주기도 하면서 허물없는 사이가 됐다.
PD들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었다. 껄렁껄렁한 그는 30대 후반쯤 되고 대여섯 살 아이가 있는 유부남이었다. 난 여고시절 쫓아다니던 선생님을 대하듯 공공연하게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녔다.직원들이 '너조PD좋아한다며?'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그도 아마 소문을 들었으리라.
주말 오후였다. 직원들 다 퇴근하고 나 혼자 남아서 아이템 짜느라 사내 도서관을 이용하러 갔다가 문이 잠겨 포기하고 나가려는데 그때 그 PD가 보였다.
- 니가 이 시간에 웬일이냐?
- 도서관 이용하려다 문 닫혀서 그냥 갈려고요.
- 아, 오늘 나 당직인데 나한테 열쇠있어. 문 열어줄게. 다음 주 아이템 아직 못 찾았구나?
- 네, 감사합니다.
그가 먼저 앞장 서더니 잠시후 도서관 문이 열렸다.
나는 스크랩되어있는 신문이나 월간지 같은 걸 뒤지고 있었다. 그도 따라 들어와 기웃거렸다.
뭔가 묘한 기운이 아무도 없는 도서관 안을 가득 채웠다. 잔잔하게 형광등 불빛 소리만 지잉지잉 흘렀다.
나는 넓은 테이블 위에 걸터앉아 가져온 책을 뒤적거리고 있었다.굳이 의자에 앉지 않고 테이블 위에 걸터앉았는지 모르겠다. 몸에 밴 '끼'라고 해두자. 은근슬쩍 그가 내 옆에 따라와 앉았다. 잠시 둘 다 뻘쭘해졌다. 그리고 침을 꼴깍 삼켰다. 왜 그런 타이밍에 매번 침이 고이는걸까, 인간의 성욕은 식욕에서 시작되는걸까?
- 오늘 주말인데 뭐하니?영화나 보러 갈래?
올게 왔다. 이걸 기다렸나, 뜬금없이 훅 들어오는 그의 개인적인 질문, 그 찰나에 나는수 만 가지 생각을 했다. 우선 그의 아기, 그의 와이프, 또 나의 남자 친구, 그리고 이 곳 방송국 사람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어 테이블에서 훌쩍 뛰어내려왔다.
- 에이, 왜 그러세요, 사모님이 알면 어쩌려고요.
읽던 책을 제자리에 꽂아놓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의 표정을 보지 못했지만 영화 '원스'에서 주인공 그가 그녀에게 하룻밤 불장난을 거절당했을 때 표정이 딱 그표정이었을 것 같다. 자기도 몰래 입 밖으로 내뱉고 10초 만에 후회하던 표정,,,
사실 나도 10초 만에 후회했다. 그냥 영화 보자고 할걸,
그 후 방송국 일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서 방송국 일도 시들해졌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