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말에는 필터가 없다. 그래서 가끔은 엘리베이터에서 민망해지고 또 가끔은 무표정으로 지나가던 사람들이 갑자기 웃는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창조의 욕구가 있다고 믿는다. 직장 생활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생산적이지 못한 시간의 반복에 대한 스트레스도 자리하고 있다. 어쩌면 무언가를 생산해내고 싶은 욕구는 세상을 창조한 신의 성품인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은 말문이 틔고 나면 쉴 새 없이 쫑알 거린다. 무슨 말인지도 모를 자기만의 표현을 끊임없이 늘어놓는다. 그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나와 아내는 열심히 귀담아듣고 과장된 맞장구를 쳐준다.
문득 아이에게 '말'은 가장 생산적인 활동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몸으로는 아직 뭔가를 만들어 내기엔 역부족인 시기에 언어야 말로 무한한 생산 활동이며 동시에 주변의 반응도 좋으니 아이의 입장에서는 가장 효능감을 높여주는 활동일 수도 있겠다.
어젯밤, 아이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불을 끈 침대에 누워 아이랑 한 수다를 떨었다. 평소라면 엄마랑 누웠을 테지만 어제는 아빠랑 자겠다며 내가 간택을 당했다. 영광스러운 순간이다. 비록 재우고 나오면 정신이 몽롱해지긴 하지만.
많은 말들 중에 유난히 기억에 남는 말들이 있었다. "아빠, 아빠가 재밌게 놀아줘서 너무 좋아." "나는 엄마랑 아빠의 소중한 보물." "매일매일 아빠랑 같이 자고 싶어. 오늘은 아빠랑 자고 내일은 엄마랑 자고." (응? 매일 이라며...) "아빠, 오늘은 내가 토닥토닥해줄게." 한참을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더니 마지막엔 이 한 마디를 꺼냈다.
"아빠, 근데 엄마는?"
역시. 아이에겐 엄마지.
굳이 따지자면 틀린 표현도 많고 앞뒤가 맞지 않는 것도 수두룩 하지만 4살짜리에게 그걸 바라면 내가 이상한 사람일 테고, 그 많은 표현에 아이가 엄마 아빠를, 가족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가끔 아이에게 '버럭' 화를 낼 때도 있고, 내 감정을 이기지 못해 감정적으로 대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지나고 늘 후회했다. 어떤 날은 혹여 아이의 마음에 상처나 부정적인 감정의 뿌리를 내리게 만든 게 아닐까 염려도 됐었다. 그런데 어젯밤 아이의 마음에는 '사랑'과 '소중함'이 가득 담겨 있음을 알게 되었다. 순간 녹음 앱을 켜지 않은 게 오늘에야 후회가 된다.
아이와 시간을 보낼수록 깨닫는다. 아이는 스스로 성장해 나간다는 것을. 부모는 옆에서 신뢰의 물을 부어주고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때에 따라 양분을 제공해 주는 것 말고는 굳이 더 할 게 없다. 그런데 자꾸 더 하려고 하는 과한 마음이 아이의 성장을 늦춘다는 걸 잊어버릴 때가 많다.
많은 걸 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늘 미안함과 아쉬움이 남지만 이렇게 잘 자라주고 있어서 너무나 고맙다. 삶이 허락하는 모든 날 동안 서로에 대한 소중함을 꼭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때론 마음이 틀어지는 날도 있겠지만 그래도 가족이기에 언제든 서로를 보듬어 줄 수 있는 신뢰와 사랑의 관계로 함께 시간을 쌓아갈 수 있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