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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은 Jan 26. 2024

나는 겨울비가 슬프지 않다

자작시

나는 겨울비가 슬프지 않다

밤사이 흔적도 없이

온 세상을 감쌌던 순백의 아름다움을

모두 녹여버렸을지라도


그것은 세상에서 영영 사라진 것이 아닌

단지 우리 눈에 보이는 모습만 바꾸어

한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변화한 것뿐이기에


어두운 밤길을 홀로 밝히는 가로등 밑

앙상한 나뭇가지들 위로 알알히 맺힌 빗방울들이

아무도 모르게 소리 없이 반짝이고 있었고


우산 위로 톡톡 떨어지는 빗방울들의 연주는

어릴 적 피아노 의자를 엉금엄금 타고 올라가

육중한 뚜껑을 열어젖혔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뚜껑이 열리며 거대한 고래의 입이 크게 벌어지듯

그 안에 벨벳같이 부드러운 붉은 덮개 밑으로

가지런히 놓인 수많은 하얀 치아들이 등장했다


겁이 많았던 나는 내 안의 모든 용기를 끌어모아

세상에서 제일 신중하고 경건한 마음이 된 후에야

고래의 입안에 조심스레 두 손을 올려놓곤 했다

 

눈같이 하얀 건반들을 하나하나 누를 때마다

떨리는 손끝으로 느껴졌던 단단한 묵직함이

외로운 고래의 노래처럼 아득히 퍼져나갔고


피아노의 투명한 물결 같은 소리는

한음 한음 천천히 깊은 여운을 남기며

밤하늘의 별들이 되어 내 마음을 밝혔다


첫 만남의 기억은 차가운 빗방울 하나 되어

나뭇가지처럼 앙상해져 버린 내 마음에

멈추지 않는 거대한 파문을 일으켰고


서투르기에 때론 모든 것이 꿈같이 황홀했던

그 작고 평범한 기억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안에 초록이 무성히 자라났다


나는 과연 이 초록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끊임없는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 헤맸다


그것은 지친 어느 나그네에게 쉼터가 되어주고

서투른 내 연주로 육체보다 고단할 그의 영혼 안에

겨우내 수북이 쌓였던 눈을 모두 녹인 뒤

마음속 깊이 잠들었던 용기를 깨우는 일일까?


그것은 모든 감정들은 그저 모습만 바뀌는 것이며

고통과 슬픔, 이별과 상실, 고독과 불안 모두

변화할 수 있고 또 변화하리라는 믿음과 확신을

지쳐 잠든 그 나그네에게 속삭여 주는 일일까?


그것은 차갑게 얼어붙은 내 마음 안의

상처와 두려움 모두 겨울비에게 내맡기고

육중한 내 마음의 뚜껑을 열어젖힌 뒤

새하얀 건반들위로 손가락을 다시 올려보는 일일까?


그리고 한음 한음 천천히 깊은 여운을 느끼며

나를 위한 나만의 연주를 시작해 보는 일일까?

외로운 고래의 노래가 아득히 퍼져나가

누군가의 밤하늘에 별이 되는 그 순간까지


나는 우리 모두가 함께 울고 웃으며

서로를 위로하고 북돋아주고 이끌어주는

눈부시게 따뜻한 푸른 봄을 고대하며

이 겨울비를 기쁘게 맞이해 본다





https://youtu.be/SYQeWTHRb40?si=j0qwasBYFL0K0UPg

날씨의 아이 OST- Weathering with you 를 들으며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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