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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은 Mar 06. 2024

이 문이 열리면

서른 초반, 독립한 지 어엿 십 년

그러나 매번 부모님 댁에 돌아갈 때면

새 학기를 맞이하는 아이 같은

설렘 반 긴장 반의 마음으로

익숙한 집 밖을 나선다



익숙한 거리들을 지나며 조금씩 줄어드는 거리

거리가 줄어들수록 잊고 지냈던 기억들이

먼 꿈 속에서 깨어나듯 하나 둘 깨어나

신비로이 반짝이는 은하수 되어

어느새 깜깜해진 밤하늘을 환히 밝힌다



밤하늘이 아름답게 수놓아질 즘에

발걸음은 익숙한 현관문 앞에 멈춘다

그 정든 문을 열기 전

나는 깊이 숨을 들이 마신 뒤

아이처럼 두 눈을 꼭 감고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운다



이 문이 열리면 내 마음의 문도 함께 열린다

나는 열린 마음으로 모든 것을 맞이할 수 있다

오로지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은

포기하지 않고 내 마음을 돌보는 일

그리고 마음의 평화를 고요히 유지하는 일



이 문을 들어서는 나는 어릴 적 내가 아닌

생각할 힘이 있고 감정을 놓아줄 수 있으며

마음을 헤아릴 줄 알고 관대할 줄 알며

대화를 통해 내 마음을 온전히 전할 수 있는

어엿한 한 어른임을 기억한다



그리고 이 문을 다시 나설 때 나는 바라본다.

내 마음 우물 속 깊은 곳에 오랫동안 자리했던

시린 슬픈 눈물들과 소리 없던 서글픈 울음

나약했던 어린 나를 향했던 차가운 분노와 절망

그리고 삶에 대한 끝없는 갈구와 물음들



그 우물을 길어 올리고 길어 올려

흐르는 눈물은 고운 손수건으로 닦아주고

울음은 마음껏 쏟아져 나오도록 등을 두들겨 주고

차가운 분노와 절망은 봄날의 따스한 햇살을

듬뿍 받을 수 있도록 양지바른 곳에 뉘어주어



삶을 향한 나의 마음과 믿음이

미움과 괴로움으로 얼룩진 투쟁이 아닌

그 어떤 척박한 땅에서도 꽃을 피우는 민들레처럼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곧바로 일어서는 오뚝이처럼

희망의 노래를 부르고 사랑의 춤을 출 수 있기를



익숙하고 정든 문 손잡이를 당기며

강력한 주문 속에서 태어난 한 마리 거대한 용이

힘센 날갯짓으로 하늘 높이 승천하여

하얀 구름들위에 사뿐히 앉아 내려다보는 듯

위대한 용기와 의지가 내 몸과 마음을 가득 채운다



서른 초반, 독립한 지 어엿 십 년

익숙하고 정든 고향을 방문하는 감회가 새롭다

새 학기를 맞이하는 아이 같은

설렘 반 긴장 반의 마음으로

나는 익숙한 집 문을 열어본다




사진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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