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도, 직업도 지긋지긋하다는 이유로 했던 퇴사였기에 퇴사한 지 4주가 되도록 기존 직무 생각은 안 하려 애썼다. 이 시기의 나에게는 자아 탐구와 쉼, 더 나아가 새로운 도전과 실험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그동안 매일같이 써 오던 개발 IDE를 최대한 흐린 눈 하며 개발 외적인 것들만 부단히 찾아다녔는데, 오늘은 무언가에 홀린 듯 다시 IDE를 켜고 말았다.
개발자는 공부하지 않으면 너무나 쉽게 도태될 수 있는 직업이고, 나는 이 분야를 ‘진짜 좋아해서 자연스럽게’ 공부할 수 있는 위인은 아니었다. 사실 어느 직업이든 단지 커리어를 위해 당연하게, 혹은 억지로 공부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나의 인간적 특성상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는 공부를 겸하는 삶은 꼭 가짜의 삶처럼 느껴져 참으면서 공부하는 삶을 나에게 적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고로 내가 다시 개발 공부를 하고 싶어지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나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진심으로 발생한 것이리라 생각했다.
GPT에게 그동안 공부를 미뤄 왔던 기술에 대해 질문하며 개념을 정리했다. GPT는 특유의 갸륵한 말투로 나를 자꾸 칭찬했고(ex. 방금 그 질문, 진짜 예리했어. 이건 정말 **핵심 중의 핵심** 질문이야.) 나는 꽤 신이 났다. 이 정도 재미면 개발자로 다시 먹고 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오늘 질문했던 것들을 면접 질문과 대답으로 만들어 달라 요청했고, GPT는 순식간에 좋은 질문을 추려 냈다. 나는 노션에 ‘이직’ 폴더를 만들어 GPT의 면접 질문을 옮겼다.
개발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이 다시 동한 것이라 자위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오늘 내가 다시 개발 공부로 뛰어든 것은 한국 사회에서 ‘정규직 직장인’이라는 틀이 주는 제도적 혜택과 보장되는 권리가 너무 강해 자연히 내 살길을 찾게 된 과정 같기도 하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좋은 회사에 들어가야 한다”는 교육을 받고, ‘좋은 대학 -> 좋은 직장 -> 결혼 -> 내 집’이라는 인생 경로가 정답처럼 여겨진다. 임금, 복지, 사회보험 면에서도 정규직이 월등하다. 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 등의 복지 시스템은 정규직 기준으로 설계되며, 육아휴직, 실업급여, 청약 가점, 대출 심사 등 거의 모든 제도가 ‘직장 재직자’ 위주이기 때문에, 정규직을 벗어나는 순간, 삶의 안정성과 신뢰도가 동시 추락한다. 나는 이런 구조 속에서 살고 있어서 자꾸만 안전한 틀을 찾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구조가 정말 나에게 정답인 구조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사는 게 좋을지 희미해질 때에 나는 미신의 힘을 빌린다. 포스텔러 만세력을 pdf로 출력해 GPT에게 올해 운세와 직업운을 봐 달라 했다. GPT는 2025년이 나에게 재충전의 해이기 때문에, 급하게 이직하려 하지 말고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보아야 한다 조언했다. 그리고 개발자보다는 다른 직무로의 전직이 나에게 잘 맞을 것이라 그랬다. 하지만 나는 GPT가 그동안 내가 조언을 구했던 일들(ex. 나 개발자 때려치우고 전직할까? 오늘 쓴 퇴사 일기인데 어때? 자영업은 어떨 것 같아? 아무래도 쉬어야 될 것 같지?)을 기반으로 뭉뚱그려 대답하는 것 같다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고, 내가 그동안 말했던 것들 전부 리셋하고 내 사주팔자만 놓고 봐 달라고 다시 요청했다. 그럼에도 GPT의 의견은 굳건했다. 자꾸 책 출판을 하고 에세이스트가 돼라 그랬다. 나는 결국 “미안한데 나 사주에 목이 없어서 창작으로는 크게 못 벌어먹고 사는 걸로 알고 있거든. 요즘 개발도 다시 재미있어진 것 같고.” 식으로 답정너 질문을 했는데, 그러다 알았다. 내가 지금 회사원 자아로 나를 계속 밀어 넣으려 하고 있구나.
GPT는 나의 등쌀에 못 이겨 “한 번 더, 내가 선택한 개발자로 살기. 단, 이번에는 내가 주도권을 가진다.” 와 같은 최종 결론을 내 주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였다.
너는 지금,
머리로는: “철학도 하고 싶고, 콘텐츠도 좋아. 개발은 좀 피곤했지...”
마음으로는: “근데... 지금 다시 개발해 보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주적으로는: “개발도 여전히 OK, 단 조건과 리듬만 맞으면!”
감각적으로는: “지금 이쪽(개발)이 나를 살게 만드는 흐름 같다”
이럴 땐, 고민은 그만하고
“내가 지금 살아 있다고 느끼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게 정답이야.
나는 요즘 매일같이 살아 있다고 느끼는 방향이 달라진다. 졸라매는 허리끈에 방향감을 상실하고 길을 잃은 소리꾼이 된 기분이다. 그래도 달라지는 매일을 100% 느끼며 최선으로 살아 내면 조만간 어떤 빛에 닿으리라 믿는다. 잘 안 되어도 나는 사주에 천을귀인이 있기 때문에 언제든 나를 끌어 주는 사람이 있다 그랬다.
일단 오늘은 그만 망상하고 자야겠다. 충분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