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결혼식 사진들을 다시 열어보았다.
당시에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내가 원하던 결혼식을 기획했다고 생각했고, 만족스러웠었다. 남편도, 우려가 많았던 양가 부모님도 즐거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한동안은 외장하드를 열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고, 2년이 흘렀다.
모든 추억이 그러하듯 시간과 섞여 희석되었다. 머릿속엔 가장 아름다웠던 장면들만 남았다.
대부분은 내 눈에 보였던 장면들. 공간을 채운 장식.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녹음.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 그곳에 와준 지인들의 신나는 웃음소리. 기분 좋은 소란스러움.
이와 달리 사진에 보여지는 것은 대부분 나의 모습이었다. 식장을 꾸미는 나의 모습. 단장을 하는 나의 모습. 입장 전 긴장한 나와 신랑의 모습. 가족, 친구들과 함께하는 나의 모습.
이상하다. 이상하리만치 나는 잘 웃지 못하고, 예쁜 식장에 어울리지 못한 모습이다. 분명 즐거웠던 것 같은데, 평소와 달리 최대한으로 꾸민 나의 모습이 어색하다.
그때 사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드레스로 갈아입기 전 셔츠에 편한 통바지, 쪼리를 신고 편하게 앉아있는 모습. 이게 난데. 나는 왜 일생의 중대사인 결혼식에 한껏 꾸며진(disguised)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는가.
사실 나는 화려하고 긴 드레스가 싫었다. 수트를 입고 싶었다. 나에겐 그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변에서 요구하는 여성스러운 신부의 모습이 나를 자꾸 옥죄어왔다. 여성인데, 일생에 한 번뿐인 중차대한 날인데, 예뻤으면 좋겠다고. 그래야만 한다고.
흔들렸다. 나에겐 남성성이 있다. 자존심이 세고, 직설적이고 강압적인 언어가 나올 때가 있다. 가끔은 남자인 친구들을 대할 때 더 편했다. 남들의 감정에 섬세하지 못하고, 배려심이 부족하다. 반대로 생각하면 결단력과 강단이 있다.
아마도 나는 나를 바라볼 이들의 시선이 두려웠던 게 아닐까. 화려한 드레스를 입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결국 굴복했다. 땅에 끌리는 무거운 드레스와 얼굴을 가리는 베일이 상당히 불편했다. 긴 속눈썹을 붙인 진한 화장이 싫었지만 그저 해주는 대로 했다. 솔직히 다른 선택지를 생각할 정신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나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철학자이자 소설가 시몬 드 보부아르는 말했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내 모습은 만들어졌다.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상에 부합하지 않았던 나의 실제 모습은 두꺼운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오고자 부단히 노력했지만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다시 감춰졌다. 역할이 이분법적으로 주어질 결혼생활을 상상하면 구역질이 나서 비혼을 선언하려 했다. 그러다 나와 달리 여성성을 지닌 남성을 만나 관계를 맺고 말았다.
결혼 후에도 하고 싶은 일들을 다 하면서 살고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지만 여전히 결혼했으면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발언은 역겹다. 역겹지만 그렇지 않은 척을 잘하게 되었다. 웃으면서 한 귀로 흘려버리는 연습이 늘고 있다. 그러나 그 말들은 나를 통과하면서도 흉터를 남긴다. 누구라고 아무 이유 없이 아이를 낳는 게 극도로 싫을까. 한국 사회가 앗아가버린 '아이를 가지는 즐거움'이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은 어쩌면 생물학적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모성이란 대체할 수 없는 사랑이 아닌가. 대지(Mother earth)가 무지몽매한 인간을 품었듯 엄마로써 아이를 품는 행복감은 그가 돼 보지 않고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내 안의 남성성과 여성성은 견제하고 견제받으며 줄다리기를 한다.
남성성을 상징하는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질서 또는 그러한 모습이 나오는 것을 경계하지만 더불어 여성성을 상징하는 조신하고 순종적인 모습 또한 멀리한다. 결정이 필요할 때는 과감하지만 어려움에 처한 존재를 만나면 약해진다. 각각의 성향은 상황에 따라 더 크게 발현되기도 하고, 발현되지 않기도 한다. 나의 생물학적 모습(외형)은 여성이니까, 나의 성별은 남성 40%, 여성 60%쯤 되는 것 같다(적어도 지금은). 모든 이가 자신에게 내재된 여성성 또는 남성성을 발견한다면 더 이상 성별로의 구분이 의미가 있을까. 나에게 젠더정의란 그렇다. 남성성과 여성성, 그중 어떤 하나가 좋고 다른 하나는 나쁘다가 아니라, 서로 견제하며 균형을 이루는 것. 그러나 어쩌면 억압적인 남성성이 자연 상태에서는 강자가 되어 약자의 목소리를 감춰버릴 수 있으니 약자에게 조금 더 섬세하게 귀 기울이는 것. 하지만 이 글의 가장 큰 오류는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단어가 연상시키는 이미지 또한 사회가 만들어낸 것이라는 사실이다.
지인들의 결혼식을 다니는 게 일상이 되면서 드레스 안에 감춰진 낯선 지인들을 목격하게 된다. 열에 아홉, 아니 이십에 열아홉은 화려하고 빛나는 큐빅이 박힌 드레스 차림이다. 찰떡같이 잘 어울리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덜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 예쁘고 덜 예쁘다는 의미가 아니다. 내가 알고 지냈던 그들의 모습과 결이 다른 경우가 많다. 모두들 사회가 원하는 여성상에 맞추기 위해 변장한 모습이랄까.
다시 2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묵직한 드레스를 벗어던지고 싶다. 사진을 돌아봐도 어색하지 않은 모습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