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형 카페는 한적한 곳에 너른 땅을 사서 정원을 아름답게 꾸미거나 아예 자연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물가나 수풀가에 터를 잡는다. 카페 내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자리는 언제나 인기다. 커피값을 지불하는 순간, 커피 한잔의 가치치고는 너무 과하다고 생각하지만 돌아서서 감각적인 인테리어와 마음을 정화시키는 생태계의 일부를 보는 순간, 감상료와 힐링값 치고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원이 없는 아파트에 사는 우리는 과거 원시인으로서 자연 속에서 살았던 자아의 본능으로 자연 안에 있고 싶어 한다. 이 본능을 간파했는지 카페 주인들은 내부를 거대한 관엽식물로 가득 채워 흡사 식물원처럼 꾸며 놓았다.
남편과 강화도로 나들이를 나갔다. 우리가 찾은 곳은 메타세콰이아 숲이 있는 카페였다. 처음에는 여느 대형카페처럼 카페 안에서 숲뷰를 감상하는 곳일 거라고 생각했다. 내비게이션이 산속이 아닌 시골 마을로 안내하기 전까지는. 주차를 하고 들어가니 카페 내부는 온갖 종류의 식물과 아기자기한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주문한 차를 들고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을 따라가 보니 아담한 숲이 보였다. '이곳은 사유지입니다.'라는 표지판이 이 숲이 카페의 일부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자연발생적이라고 하기에는 작은 연못 주변으로 놓인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사람들이 지나가기 적당한 공간을 남겨두고 선을 그은 듯 동그랗게 심어진 메타세쿼이아가 너무나 계획적이었다.
"이 카페의 주인은 카페를 위해 연못 주변에 메타세쿼이아를 심었을까?"
호기심이 발동한 내게
"이 나무들 좀 봐. 족히 몇십 년은 되어 보이고 키는 4-5m 정도 되어 보이는데 이걸 가져와서 심었다고?"
나보다 더 강한 T 보유자 남편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웃었다.
카페 설계자는 중정을 공유하기 위해 카페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숲 안에 테이블과 의자를 두어 숲 자체를 카페로 만들어 버리는 아이디어를 냈다. 봄볕이라고 하기엔 서운할 만큼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도 몽환적이면서 작은 숲 속은 초록의 시원함을 전해주었다.
공간이 주는 위로는 특별하다. 가족들과 식탁에 앉아서는 쉽게 꺼내지 않는 속마음도 자연과 가까운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하면 푸딩처럼 말랑해진 마음 탓인지 대화가 샘솟는다. 친구를 만나도 일상의 공간보다는 특별한 공간의 행복 탓인지 이야기가 더 맛있다.
일의 능률을 올리기 위해서도 카페를 찾게 된다. 휴일에 일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라는 위안도 한몫한다. 때론 아침 일찍 나 홀로 동네 카페를 선점했을 이 공간 전체가 나를 위한 것이라는 이벤트적인 기쁨은 더 뿌듯하다. 집에서는 도통 써지지 않는 글도 노트북 하나 들고 동네 작은 카페에 앉으면 글감이 어렵지 않게 떠오른다. 혼자인 게 좋지만 혼자여서 더 나태해지고 게을러지는 자신을 위해 각자의 이유로 바쁜 사람들 속에 합류한다. 이곳에서 느껴지는 활기와 사람들의 이야기가 백색 소음이 되어 집중력을 발휘하게 만든다.
자연 속에서 걷고 싶지만 걷기에는 때때로 피곤한 나를 위해 카페에 난 창을 통해 푸른 나무와 호수를 눈에 넣는다. 적당히 떠드는 사람들 틈에서 나의 인연들과 관계의 깊어짐을 추구하거나 나 홀로 내면의 단단함을 다지면서 공간으로부터 위로를 받는다.
이런 이유로 대형 카페의 인기와 진화는 계속될 것 같다. 사용료는 세금으로 퉁치며 도서관에서 공간의 위로를 받고 있는 나도 가끔은 북한산이 보이는 카페나 메타세쿼이아 숲 속 테이블에 앉아 글을 쓰고 수다를 떨고 싶으니 말이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 수많은 대형카페가 들어선다는 건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공간에서 위로를 받고 있어서가 아닐까. 집안에 중정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대형카페를 중정 삼아 마음속 엽록소를 채우고 있기에 대형카페가 주는 행복은 당분간유효할 것 같다.
한 줄 요약 : 크고 작은, 멀고 가까운 카페가 주는 공간의 위로와 기쁨은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