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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나들이 Nov 14. 2024

나답게 산다는 것

데미안



소설 데미안에서 싱클레어는 선과 악의 두 세계에서 끊임없이 갈등한다. 유복한 환경과 모범적인 집안 분위기,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해 바르게 자라는 누나들까지, 싱클레어 자신만 특별히 나쁜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그의 가족은 품격 있게 완성된 예술품처럼 완벽했다.


하지만 마음속에 꿈틀대는 악의 본능을 주체하지 못한 싱클레어는 불량한 크로머의 마음에 들기 위해 사과를 훔쳤다고 거짓말을 하게 되고 그의 영혼은 크로머에게 착취당해 정신착란의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된다.

평화로운 선의 세계에서 굳이 악의 늪에 발을 담가 점점 자신의 몸과 영혼을 삼키는 그곳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다고 느낀 순간 막스 데미안이 나타난다.

데미안은 마법을 부리듯 싱클레어의 발목을 붙들고 있던 크로머의 손을 쳐 내주었고 싱클레어는 크로머로 둘러싸인 악의 세계에서 빠져나온다.


헤르만 헤세는 이 소설을 발표할 때 유명세에 의해 소설이 평가받는 것이 싫어 싱클레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소설은 큰 화제와 인기를 누리게 되고  이후에 어느 평론가에 의해 이 소설의 문체가 헤르만헤세의 것임이 밝혀진다.


소설 데미안은 작가의 유년시절을 담고 있는 자전적인 소설이다. 그는 크로머와 데미안으로 대변되는 두 세계에서 갈등하는 싱클레어의 모습을 보여주며 결국 그 두 세계와 인물 모두 싱클레어 자신임을 암시한다.


아브락사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데미안 속 문이다.

이 문장의 마지막나오는 낯선 이름 아브락사스는

선과 악, 명과 암, 신과 악마등 모든 양면적인 것들이 통합된 신이다.


그는 이 이름 하나로 소설 데미안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싱클레어는 10대 초반부터 끊임없이 자신을 찾기 위해 분투한다. 선과 악 중 어떤 것이 자신의 모습인지 여러 인물을 만나고 탐색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찾아간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장면, 전장의 침대에서 자신 옆에 누워있는 데미안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살면서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가령 문제 상황에 직면했을 때

감정이 이끄는 대로 화를 내버릴 것인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참을 것인가,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피할 것인가를 놓고 순간적으로 갈등하게 된다.

그 순간 내 심연에 있는 본성의 자아와

인생을 살면서 여러 상황과 갈등에 의해 교육된 사회적 자아가 충돌을 일으킨다.

그러면서 어느 것이 나의 진정한 모습인지

어느 것이 나의 내적 정체성인지 갈등하게 된다.


데미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자아는 하나의 모습으로 규정지어질 수 없다.

어떤 시기인지,

어떤 상황인지,

어떤 상대인지,

어떤 처지인지,  

어떤 기분인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나는 왜 이렇게 변덕이 심할까, 그땐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라고 자책하기보다

여러 가지 변수가 상황을 다르게 만들고 그때의 나에 맞는 행동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하자.


공간과 시간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관찰자와 관찰되는 대상 모두에게 상대적인 것이라는 상대성 이론처럼 어떤 문제는 절대적일 수 없다. 관찰자 즉 주위사람들과 관찰되는 대상 즉 우리 자신 모두에게 상대적인 것이다. 만고의 과학 법칙도 그렇게 말하는데 상황마다 달라지는 우리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위안을 삼아도 좋다.


매일 변하고 흔들리고 있다는 건

성장하기 위해 끊임없이 사유한다는 말이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른 건

새로운 자아를 만들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는 말이다.


확고하고 변하지 않는 자아를 가진 사람은 자칫 아집과 독선에 빠지기 쉬울지도 모른다. 반대로 매번 선을 실현하고 있다면 가슴 한쪽에 상처를 숨기고 있을 수도 있다. 그 사람이 예수나 부처가 아닌 이상에는 말이다.


선과 악의 세계에서 갈등하고 충돌하는 일상!

자상해서 좋았던 가족이나 친구의 말과 행동이 간섭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무심해서 편했던 동료의 행동이 서운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겠다.


세상에 악한 범죄를 제외하고 나쁜 일과 나쁜 사람의 정의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저 때론 나에게 나쁘게 느껴졌고 때론 나에게 좋게 보였으며 때론 그 상황에 맞게 받아들였고 때론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정도로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저자 빅터 프랭클이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논문을 완성하겠다는 일념이었다고 한다. 극한의 상황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한 논문을 완성하고 수용소의 비극을 알리는 것이 그의 삶의 이유가 되었고 목숨을 이어갈 수 있는 생명의 끈이 되었다. 이것은 곧 그의 내적 정체성이 되었다.

그는 수용소의 사람들 중 대부분이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을 때 눈동자의 초점을 잃고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죽어가는 모습을 목도했다고 한다.


흔들리는 일상 속에서 삶의 목표와 원칙을 가지는 것, 그것이 거창하지 않아도 소박하고 평범한 것일지라도

흔들림 속에서 하나로 이어지는 묵직한 심지가 보일 것이다.


그것을 지금 당장 느낄 수 없더라도 이후에 먼 길을 가다 문득 되돌아보면 내가 지켜온 심지, 나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 믿어보자



한 줄 요약 : 흔들리는 일상에도 삶의 목표와 원칙을 가지고 하루하루 걷다 보면 언젠가 내 길을 관통해 온 내적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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