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너나들이 Nov 16. 2024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성장한다.

소년이 온다.


한강 작가는 소설 '소년이 온다'를 집필하던 어느 날, 단 세 줄을 쓰고 하루 종일 울었3다고 한다. 인물의 심리묘사나 상황 설정이 뛰어난 소설가이니 그만큼 감수성이 예민하고 감정이입의 정도가 깊어 그러려니 했다. 그러다 '소년이 온다' 앞부분 몇 장만을 읽고도 작가의 고통을 조금은 이해했다.


도청 상무관에 누워있는 수많은 시체들에게 천을 잘라 덮어 주고 실종자를 찾으러 온 유족들을 위해 천을 들어 보여주는 중학생.

반투명 창자가 끝없이 튀어나오고 퉁퉁 부어 옷이 맞지 않는 시체를 닦아주는 수피아여고 여학생.

그리고 한순간에 주검이 되어 상무관에 누워 부패하고 있는 시민 1,2,3.....

그들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리면서 한 문장 한 문장 읽어 내려가는 것이 참 힘겨웠다. 한 번 덮은 책은 다음 날 쉽사리 열리지가 않았다.


아침부터 읽지는 못하겠어, 잠들기 전에 읽지는 못하겠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읽어야 해.

통발에 걸린 물고기가 요리조리 도망갈 구멍을 찾는 것처럼 그렇게 빠져나갈 구멍을 찾았다. 결국 빠져나가지 못할 걸 알면서.


누군가를 진정 아끼고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상처받지 않을까 살피고 위로하고 배려하게 된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그 사람을 위한 선의로 변하고 순화된 말과 행동이 그 사람에게 적절한지 떠올리게 된다. 사랑하는 마음이 저절로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는 건 어른의 마음이 되어간다는 뜻이다.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듣기 좋은 말을 했다면 그건 아이가 기분이 좋고 엄마를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기분이 나빠진 아이는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의 기분 따위는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저 자신의 기분대로 투정하고 불평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어른이 된다는 건 자신의 다친 감정 조각을 잘라서 선반에 올려 두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마음을 정성스레 차려 내어 주는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과정을 통해 성장한다. 상대를 더 깊이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이 성장을 거든다.


수피아여고 학생들은 아직 청소년이지만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 세상 전부를 잃은 사람들이 와서 그 세상의 전부였던 가족의 얼굴을 잘 확인할 수 있도록, 피투성이에 형편없이 망가진 얼굴 대신 혈흔이 남지 않은 얼굴을 보도록 잘 닦아준 것이다.


죽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때로는 나이가 적어도 어른일 수 있고 나이가 많아도 아이일 수 있다. 이 여학생들이 어른보다 더 어른이 될 수 있었던 건  힘없이 무고하게 죽어나간 사람들에 대한 위로와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을 닦아주려 걷어 올린 천 아래에서 눈알이 튀어나오고 목젖이 드러난 광경을 목도하고 구토를 참지 못해 고통을 게워내면서도 끝까지 그들을 지켜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맡에 조용히 양초를 밝혀 주던 소년! 피비린내를 없애기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먼저 간 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사랑의 마음이었다.


애정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자식을 키우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죽은 사람을 닦는 것도

그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도

애정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밝고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소설만 읽고 싶은 때가 있었다. 그런 소설만 쓰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어두운 과거를, 꼭 알아야 할 부끄러운 과오를, 생각해야 할 과제를 써야 한다.


한강 작가는 그 고통을 감내하면서 본인 스스로 그 누군가가 되었고 그녀의 고통은 일정 부분 보상받았다.

그녀에게 애정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소설에 대한,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말없는 역사에 대한.


그 고통스러운 작업을 '소년이 온다'에 이어 '작별하지 않는다'로 두 번에 걸쳐 이루어 낸 걸 보면 역사를 관통하며 희생당한 이들에 대한 깊은 사랑이 느껴진다.


'소년이 온다'를 몇 번 대여해서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다는 핑계로 그대로 반납했었다. 그러다 한림원이 소설의 진가를 알아준 이후에야 책을 주문해 읽었다. 나는 그들에 대한, 역사에 대한 애정이 있기냐 했냐고 뇌까려본다.


아픈 역사와 현실을 마주하는 것이 고통스러울지라도 진정 좋은 어른으로 성장하고 싶다면 기꺼이 고통을 마주해야 한다. 그것이 그 역사를 가진 자의 숙명이다.



한 줄 요약 : 어른이 된다는 건 자신의 다친 감정 조각을 잘라서 선반에 올려 두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마음을 정성스레 차려 내어 주는 일이다.

이전 18화 나답게 산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