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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나들이 Feb 04. 2024

초간단 파김치, 부추김치, 섞박지로 김치 독립하다

김치 독립한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은 착각

 아침 일찍 우리 동네 로컬푸드에 가는 걸 좋아한다. 생산자가 수확해서 손수 진열한 싱싱한 채소를 보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기어이 파 두 단, 부추 한 단, 무 두 개를 장바구니에 담는다. 파프리카, 브로콜리, 양파, 파까지. 또 채소를 많이 사고 말았다. 남들은 아이허브가 개미지옥이라는데 나에겐 로컬푸드가 개미지옥이다. 한 번 들어가면 충동구매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요즘 사람들을 만날 때 한 번씩은 회자되는 MBTI. 10년 전 해봤던 MBTI 검사에서 나는 계획형인 J였다. 모든 걸 계획해야 직성이 풀리고 계획대로 하기 위해 애쓰는 타입. 10년이 지난 지금 충동적으로 야채를 사서 김치를 담그는 나를 보면 P로 바뀌었음에 틀림없다. 고생을 사서 한다.


 어렸을 적부터 파김치를 좋아했다. 양념에 절여진 파의 알싸한 향이 코 끝에 선사하는 청량감이 좋았다. 푹 익으면 또 나름대로 시큼하면서도 깊은 막걸리 같은 느낌을 주는 파김치의 매력에 빠졌다. 결혼 전에는 엄마가 보내주는 파김치를 받아먹었다. 내 나이의 앞자리가 3을 넘어 4로 진입하자 엄마의 신체나이는 2배속으로 달렸다. 더 이상 엄마가 나를 위해 파김치를 담그는 건 불가능했고 나의 김치 독립이 시작되었다.


 그때였던 것 같다. 나 혼자 간단하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파김치 레시피를 찾았던 것이. 반찬가게에서 파는 파김치 가격표에는 '내가 해 먹고 말지.'라며 호기부리기 좋은 다소 과한 숫자가 적혀있었다. 검색 끝에 가장 간단한 파김치 레시피를 찾았다. 가끔은 내가 알아서 배를 갈아넣기도 할 만큼 간단하다. 김치통에 파 한 층을 넣고 양념 바르고 또 한 층을 넣고 바르면 끝이다.


                          파김치


양념 : 고춧가루 2/3컵, 액젓 2/3컵, 매실 1/2컵, 배 간 것(선택)   종이컵 계량


 파 1단에 양념을 골고루 발라주면 끝.



부추김치는 남편이 좋아해서 담그기 시작했다. 경상도에서는 정구지라고 하고 충청도에서는 졸, 전라도에서는 솔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소풀, 졸파, 분초 등 30여 개의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식물이 이렇게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분명 집 앞에 무심히 올라와 있는 잡초 중 하나였을텐데 이름 한 두 개로는 감당이 안 될 만큼 꼭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나물 중에 전도 부쳐먹고 국에도 넣어먹고 생으로 김치도 해 먹을 수 있는 게 몇 개나 될까. 이렇게 전천후가 가능하니 사랑받게 되었나 보다. 부인으로, 엄마로, 딸로, 직장인으로, 며느리로, 형제로, 친구로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며 전천후 역할을 해내야 하는 우리의 삶도 사랑받아서 그런 거라고 위안해 본다.


부추김치레시피도 아주 간단하다. 파김치의 고춧가루, 액젓, 매실 양념에 식초만 추가하면 된다. 사과를 갈아 넣으면 더 맛있어지지만 이건 선택이다. 게으름이 시도부터 막아버리면 안 되니 일단 간단하게 가본다.

부추김치는 찍어 놓은 사진이 없어 비슷한 사진을 가져왔어요.


                              추김치  


  양념 : 고춧가루 2, 액젓 2, 매실(요리당) 1, 식초 1,  당근 1/4, 양파 1개 채썰기, 사과 간 것(선택) 밥숟가락 계량


   부추 1단에 양념을 버무리면 끝


섞박지는 우리 딸이 좋아하는 김치다. 이름으로 나를 헷갈리게 한 김치다. 박지로 알고 있었는데 여러 재료를 섞어 만들어 섞박지란다. 오랫동안 지인의 이름을 잘못 알고 있었던 것처럼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다. 곰국과 환상 궁합인 섞박지는 영혼의 단짝이 있어 꾸준히 사랑받을 것 같다. 곰국과 섞박지의 조합처럼 서로의 풍미와 매력을 배가시킬 수 있는 영혼의 단짝을 만난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다.


 이젠 엄마가 내 섞박지를 좋아하신다. 이번 엄마 생신 때도 섞박지를 담아서 갖다 드렸다.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있어서, 해드릴 엄마가 살아계셔서 감사할 뿐이다.


섞박지는 부추김치와 파김치보다는 약간의 수고로움이 더해진다. 찹쌀풀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그것만 지나면 맛있는 섞박지를 오랫동안 즐길 수 있다. 지퍼락에 재료를 넣고 잘 흔들어 2-3일 지나갈 때마다 양념을 섞어주기만 하면 된다.


                               섞박지


 양념 : 쌀가루 1, 고춧가루 5, 액젓 3, 꽃소금 0.5, 다진 마늘 3, 사이다 2, 설탕 1 (계량 : 밥숟가락)


1. 물 반컵에 찹쌀가루 1스푼 넣고 약불에서 저어주기

 2. 지퍼락에 무 1개와 재료를 한꺼번에 넣고 2-3일 익히면 끝.


우리 집 식탁에 자주 등장하는 간단한 김치 트리오, 파김치, 부추김치, 섞박지는 재료 손질이 끝나면 5분 만에 뚝딱 담을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간단한 요리 과정 뒤에 2~3일의 숙성기간을 거쳐야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다.


 뜨거운 물을 붓고 3분 후면 완성되는 컵라면이나 전자레인지에 5분만 데우면 먹을 수 있는 냉동식품과 조리시간은 비슷하지만 결이 다른 고고함을 지니고 있다. 무려 48시간 2880분의 숙성시간을 거쳐야 본연의 맛을 보여준다. 시간이 지날수록 맛있게 익어간다. 5분 만에 화려한 매력으로 어필하지만 잠시 뒤 질리게 하는 인스턴트 사람 말고 시간이 지날수록 깊은 매력이 느껴지는 김치트리오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옷은 새 옷이 좋고 벗은 오래된 벗이 좋다고 했던가. 사람과의 관계도 익을수록 깊어지면 좋겠다. 척하면 척. 말하지 않아도 느낌으로 아는 관계가 되면 좋겠다.


김치트리오에 서사를 부여하다 보니 괜한 애정이 샘솟는다.

만들 때는 인스턴트처럼 빠르게, 시간을 두고 만날 때는 다양한 매력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초간단 김치 트리오를 알게 된 것이 기쁘다.


김치를 담으면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좋은 아내, 좋은 엄마가 된 것 같은 우쭐함에 뿌듯해진다. 나도 먹고 싶어서 담그는 건데 괜히 생색이 내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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