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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느 Jan 09. 2023

살기 위해 움직인다.

여섯 번째 | 연말 스픽에서 살아남기

12월은 유난히 폭설 주의보가 잦았다.

프로모션 기획 업무가 많아지고, 눈도 오고, 시간에 쫓기게 되면서 재택을 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집이 멀어 응암동 라푼젤로 불리는 나는 출근만 안 해도 하루 3시간이 늘어나는 매직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일이 많아질 수록 무조건 재택을 하는 것이 유리했다.


재택을 하면 집중이 안된다, 자꾸 먹게 된다, 낮잠을 자게 된다.

이 모든 말들은 연말 프로모션을 앞둔 마케터(나)에겐 사치였다. 아침에 정신을 차리고 커피 한 잔을 내려서 책상 앞에 앉으면 그 어떤 저항도 없이 업무로 빨려 들어갔다. 


내가 재택을 하면 오직 메신저로 물리적인 공백을 매꿔야하기 때문에 슬랙은 더 바빠졌고, 책상에서 점심을 해결하는 일이 잦아졌다. 저녁 쯤에는 책상에 쌓인 온갖 그릇과 컵들을 치우는 게 자연스러웠고, 어떤 날에는 출근 하려고 밖을 나갔는데 바깥 풍경이 낯설어서 생각해보니 집에서 3일만에 나온 것일때도 있었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계절이 어떻게 바뀌는지도 모르고 열심이었다.

그런데 몸이 조금씩 경고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앉았다가 일어나기만 해도 눈 앞이 깜깜해질 정도로 어지러웠고, 체중은 평소 대비 4kg은 줄어 있었다. 병원에 가서 혈액 검사를 했더니 비타민D 부족에 갖은 영양소가 부족하다며 햇빛과 잘 차려진 밥을 처방 받았다.


생각해보니 그동안 밥이라고 먹은 것들도 책상에서 먹기 좋은 고구마나 닭가슴살, 삼각 김밥같은 것들이었다. 처음엔 다이어트도 되고 좋다고 생각했지만, 매일 아침 거울 앞에 설때마다 수척해져가는 내 모습이 스스로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래서 어느 날 저녁, 계시를 받은 사람마냥 재택 근무를 마치자 마자 양말을 주섬주섬 신고, 목도리를 둘둘 말아 올린 채로 집을 나섰다. 그리고 내가 1년을 등록해 놓고 방치해둔 헬스장을 찾았다. 내가 회원인지도 모르는 프론트 직원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몇 개월만에 런닝 머신 위에 올랐다. 


'머신 러닝 속도는 몇이 적당한 속도였더라?'

머신 러닝 벨트가 쓱쓱 밀리는 소리, 그 위에서 내 다리가 힘 없이 휘적거리는 감각, 그 속도감 모든 것이 낯설었다. 하지만 이내 곧 내 페이스를 되찾았고 심박수가 오르면서 엔돌핀인지 도파민인지 모를 호르몬이 내 몸에 퍼지는 게 느껴졌다. 평소엔 집에서만 걸어 다니니 이렇게 힘차게 걷지도 않았을 뿐더러 이렇게 오래 걷지도 않은 탓에 내 모습은 마치 이제 막 갓 태어나 자신이 걸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어린 송아지 같았다.


어느 과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양발은 양쪽 뇌와 연결되어 있어서, 걷는 것이 좌뇌와 우뇌를 발달시키는 데에 좋다'고 한다. 정말 그랬다. 걷다 보니 평소에는 mute상태에 머물렀던 건강한 생각들이 마구 깨어났다. 인생의 우선 순위들, 내가 하고 싶은 일들, 내가 가장 건강하고 행복했을 때의 기억들. 


그 날 나는 머신 러닝을 딱 15분을 탔고 나머지 시간은 매트에 슬라임처럼 누워 폼롤러로 이곳 저곳을 마사지하는 걸로 보냈다. 예전 같았으면 이렇게 밖에 운동하지 않은 나를 탓하고, 한심하게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일에 파묻혀 있던 나를 끄집어 내 헬스장으로 이끌어준 내가 참 기특하고, 운동이 나에게 준 이 에너지가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나오는 길에 헬스장에 새로 생긴 필라테스 수업까지 등록해버린 건 약간 무리수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바쁜 시기에 필요한 것은 휴식이고, 가장 효과적인 휴식은 잠을 자거나 누워서 넷플릭스를 보는 수동적 휴식보다 몸을 깨우고 마음을 가다듬는 동적 휴식이구나를 깨닫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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