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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큐레이터의 서가 Apr 09. 2021

추상미술 별건가요 #7 조형 분석, 추상미술을 만들다

조형(造形)이란 형태(形)를 만드는(造)는 작업이란 뜻이다. 미술을 조형예술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바로 미술이 형태를 만드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조형에서 형태와 색채는 둘이면서 하나이다. 미술이 탄생한 이후 줄곧 형태와 색채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였고, 색채는 형태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보조 수단이었다.


수 만년 동안 형태와 색채의 관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전통적인 사실주의 미술에서 형태와 색채는 분리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앵그르에게 형태와 색채를 관계없이 칠하라고 했다면 벌컥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도 말라고 말이다.




미술은 자연의 재현이 아니다


반 고흐와 폴 고갱은 사실주의 미술이나 인상파 미술이 너무 객관적/과학적으로 대상을 처리하다 보니 감정의 표현이나 상징적 표현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고흐와 고갱은 대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하지 않았고 자연의 형태에 관계없이 주관적으로 느낀 것을 표현했다. 그들은 마음으로 느낀 대로 형태나 색채를 과장하거나 변형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반 고흐, 까마귀가 나는 밀밭, 1890 


반 고흐의 마지막 작품 <까마귀가 나는 밀밭(wheatfield with Crows)>이다. 멋진 밀밭과 까마귀 같지만 우리의 눈이 그렇게 보는 것일 뿐, 사실 그것은 밀밭과 까마귀가 아니라 빠르고 거칠게 칠한 붓질일 뿐이다. 고흐는 강렬한 감정 표현을 위해 붓 터치를 길게 늘여 소용돌이치는 기법으로 변형시켰는데, 고흐의 작품에서 형태와 색채는 더 이상 현실을 재현하는 도구가 아니다.




미술은 표현이다



고흐에게 미술은 자연의 리듬, 색채의 리듬을 표현하는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미술은 현실과는 무관한 선과 색들로 이루어진 자율적인 세계가 되었다.


반 고흐, 오베르의 포도밭, 1890. 고흐에게 미술은 더 이상 자연의 재현이 아니었다. 말기 고흐의 그림은  그림으로 쓴 한 편의 시였다.


폴 고갱은 기억과 내면적 충동에 따라 자연의 형태와 상관없이 색을 칠했다. 고갱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리는 그림은 수준이 낮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갱에게 진정한 미술은 기억과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는 세계의 표현이었다. 기억 속의 이미지는 현실의 모습과는 다르다. 기억 속의 형태와 색채는 단순하고 강렬하다. 고갱은 순수한 정신을 추구하고자 하였는데, 순수한 정신은 추상이었다.


폴 고갱,  타이티의 붉은 산, 1891


고흐와 고갱의 미술은 수백 년 동안 지속해온 자연의 재현이라는 사실주의 미술에서 벗어났다. 그들의 미술은 자연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연과는 관계없는 미술 내적인 원리가 지배하는 세계가 되었다.



폴 고갱, 한낮의 낮잠, 1894  




형태와 색채를 분리하라


20세기 초, 앙리 마티스와 앙드레 드랭, 블라맹크와 같은 20세기의 야수파 미술가들은 고흐와 고갱의 열정적이고 현실을 과장한 작품을 보며 미술이 꼭 자연과 닮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주의 미술에서 색채는 늘 형태의 사실감을 강조하기 위해 부수적으로 사용되었는데, 고흐와 고갱은 그렇게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들은 색채를 형태만큼이나 강력하게 사용하였다. 그들에게 색채는 이전의 미술같이 형태의 부속물이 아니었다.



앙리 마티스. 붉은색의 조화, 1908-9 


마티스의 그림에서 형태와 색채는 더 이상 재현 미술에서와 같이 완전한 한 몸이 아니라 거의 관계가 없었다. 마티스의 그림에서 형태와 색채가 불안한 동거를 하고 있다. 그의 그림에서 형태와 색채의 분리는 시간문제로 보인다.




형태 없이 색채만으로도 훌륭한 미술이 될 수 있다


20세기, 야수파나 표현주의 미술가들에게 색채는 더 이상 형태의 사실감을 강조하기 위한 보조 수단이 아니었다. 그들은 색채를 형태와 관계없이 자유롭게 칠하기 시작했다. 마티스의 <붉은색의 조화>를 보면  어디가 벽이고, 어디부터가 바닥인지 구분이 되질 않는다. 마티스의 그림에서 형태와 색채는 더 이상 한 몸이 아니었다. 


모리스 블라맹크, 샤토의 풍경, 1905 


색채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재현하는 역할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이제 형태 역시 자연과 똑같이 그려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미술은 자연을 묘사하는 일을 중지하고 색채와 색채, 색채와 형태, 형태와 형태와의 조화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바실리 칸딘스키, 무루 나우의 기차와 성, 1909




미술의 내적 질서를 따르라


그림이 그림의 내적 질서에 따른다는 것은 이제 미술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는 아무런 관계를 갖지 않는, 예술을 위한 예술의 세계를 지향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실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그림의 세계는 색과 색, 형태와 색의 관계에만 매진하게 되어 결국 그림이란 조형요소들 간의 관계만으로 이루어진 추상미술이 되는 것이다.



바실리 칸딘스키, 추상 수채화, 1910년대



20세기 초, 작가의 내부 표현을 중요시했던 바실리 칸딘스키는 표현주의를 기초로 하면서 색채의 상징적 의미를 강조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는 그것을 즉흥(improvisation)이라고 불렀다. 칸딘스키의 즉흥 연작은 순간순간의 감정에 의존하여 그려지는 그림으로 칸딘스키는 1910년대 즉흥을 바탕으로 세계 최초로 추상미술을 개척하였다.


바실리 칸딘스키, 즉흥 21, 1912





칸딘스키와 <건초더미>


1896년, 바실리 칸딘스키는 모스크바에서 클로드 모네의 전시회를 관람했는데, 그는 <건초더미>의 인상주의적인 스타일에 사로잡혔다. 처음 칸딘스키는 그것이 무엇을 그렸는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중에 그는 이 경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클로드 모네, 해 질 녘의 건초더미, 1890-1


카탈로그는 그것이  건초더미라고 알려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것을 알아볼 수 없음이 고통이었다. 나는 그 화가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그림을 그릴 권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림의 대상이 없어진 것을 느릿느릿 느꼈다. 그리고 나는 그 그림이 나를 사로잡았을 뿐만 아니라 내 기억에 비할 데 없이 깊은 인상을 주었다는 것을 놀라움과 혼란으로 알아차렸다. 그 그림은 동화 같은 힘과 화려함을 띠었다. 


칸딘스키에게 모네의 그림은 추상미술이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의 생각과 눈으로 보면 안 된다. 19세기 후반, 칸딘스키와 같은 대단한 화가에게도 모네의 그림은 충격 그 자체였던 것이다.




물질에서 형태를 분리하면 훨씬 이데아에 가까워진다


20세기의 표현적 추상미술은 칸딘스키의 정신적 목표이기도 했다. 20세기 초, 무거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형이상학적인 작가들은 물체와 정신을 분리해내고자 하였다. “물질에서 형태를 분리하면 훨씬 이데아에 가까워진다."라는 쇼펜하우어에 영향을 받았던 칸딘스키는 회화가 자연에서 분리될 때 진정한 해방을 맞게 되리라고 믿었다.


20세기 초, 칸딘스키는 최초로 형태가 없는 추상미술을 창조해내었다. 칸딘스키에게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과정과 행위에 더 중점을 두면 잭슨 폴록의 추상표현주의에 이르게 된다.


잭슨 폴록, 가을의 리듬, 1950


20세기 현대미술가들에게 자연은 참고하여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고흐와 고갱의 주관적인 색채의 표현방식은 프랑스의 야수파와 독일의 표현주의를 거쳐 추상표현주의로 전개되었다. 형태와 색채의 분리는 추상표현이라는 새로운 미술을 탄생시켰다.




(좌) 앙리 마티스. 노트르담 풍경, 1914  (우) 앙리 마티스, 모로코인들, 19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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