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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둘기 Oct 07. 2024

서툰 러너에겐 장비빨이 최고다

비싼 게 좋긴 좋더라..

난 물욕이 없다. 먹고 싶은 건 많지만, 갖고 싶은 건 별로 없다. 내 옷장에 내가 산 옷은 거의 없다. 대부분 아내가 사준 옷이다. 취미 생활을 할 때도 굳이 장비를 갖춰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주짓수를 할 때도 처음 등록할 때 받았던 기본 도복만 입었다. 격투기를 할 때도 파이트 쇼츠 한 번 산 적이 없다. 심지어 시합을 나갈 때도 관장님의 파이트 쇼츠를 빌려 입었다. 차마 마우스피스까진 빌릴 수가 없어서 하나 샀다.   


  

달리기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달리기를 할 땐 그냥 아무 신발이나 신고 달렸다. 물론 구두나 슬리퍼를 신고 달리진 않았지만, 러닝화가 뭔지도 몰랐다. 난 운동화를 신고 달렸다. 그냥 운동화. ‘오늘 체육 들었으니까 운동화 신고 가!’라고 엄마가 말하던 운동화. 슬리퍼, 샌들, 캔버스화, 구두 말고 운동화. 바닥이 폭삭폭삭한 운동화. 헬스장에서도 신을 수 있고, 외출할 때도 신을 수 있고, 달릴 때도 신을 수 있는 운동화. 그중에서도 까만 운동화를 신고 달렸다.      



러닝크루에 몇 번 참석하고 난 뒤, 러닝화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러닝크루에선 러닝화만 보면 척척 이름을 다 맞추시는 분들이 계셨다. 대화 중 신발 이야기가 나왔는데, 나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신발 가격을 여쭤보니 보통 20만 원 정도에 비싼 신발은 30만 원도 넘는다고 했다. ‘그냥 아무거나 신고 달리면 되지.’라고 생각하며 가만히 듣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 갑자기 나에게 질문이 날아왔다.

“이 신발은 처음 보는 신발인데 혹시 뭐예요?”

“아…. 이건 그냥 운동화요.”     



다음 날 아내와 함께 아울렛에 있는 나이키 매장에 갔다. 지금 보니 신발이 분류되어 있었다. 패션화, 축구화, 농구화, 트레이닝화. 그리고 러닝화. ‘Running’이라고 쓰인 곳으로 갔다. 겉으로 보기엔 내가 신던 운동화와 비슷했다. 아내는 한번 신어나 보라고 했다. 내 사이즈를 찾고 한쪽만 신어보았다. 왼발은 운동화, 오른발은 러닝화. 왼발과 오른발을 비교해보았다. 그런데 오른발이 너무나 가벼웠다. 신발을 신지 않은 것처럼 가벼웠다. 흥분된 표정으로 아내에게 말했다.

“오른발은 신발을 안 신은 것 같아! 날아갈 것 같아!”

그동안 나만 무거운 운동화를 신고 달렸다니…. 억울했다. 바로 그 신발을 집어 들고 계산대로 갔다. 러닝화라 비싼 줄 알았는데, 가격은 7만 원도 되지 않았다. 내 인생 첫 러닝화를 갖게 된 순간이었다.     



7만 원짜리 러닝화로 1년 정도 열심히 달렸다. 7만 원짜리도 이렇게 가벼운데, 무슨 20만 원, 30만 원짜리 신발을 사나 싶었다. 굳이 필요 없는 사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내 러닝화가 딱해 보였다. 주인 잘못 만나서 너무 혹사당하는 것 같았다. 러닝화를 하나 더 사서 번갈아 가며 신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당시 한 크루원께서 나이키 온라인몰 할인 소식을 전해주셨다. 절호의 찬스였다. 나이키 온라인 쇼핑몰에 들어갔다.      



문제가 하나 생겼다. 신발이 너무 많았다. 무슨 신발을 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크루원 한 분께 도움을 청했다. 그분께서 매일 신기 좋은 러닝화 하나를 추천해주셨다. 추천해주신 러닝화를 온라인 쇼핑몰에서 검색했다. 가격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무려 20만 원이었다! 많은 생각이 들었다. 러닝화에 20만 원을 태워? 그럴만한 가치가 있을까?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지르고 말았다. 다음 날 퇴근하니, 집에 새로운 러닝화가 놓여있었다.



비싼 게 좋긴 좋더라. 훨씬 가볍고, 안정적이고, 탄력도 좋더라. 새 러닝화를 신고 동네를 한 바퀴 달렸다. 집에 돌아와서 1년 전 했던 생각을 다시 한번 했다.

‘또 나만 빼고 다들 그동안 진짜 좋은 것 신고 달렸네. 억울해!’

원래 있던 러닝화와 번갈아 가며 신으려 했지만, 도무지 예전 러닝화를 신을 수 없었다. 둘 사이 격차가 너무 심했다. 또다시 나는 새로 산 러닝화를 혹사했다. 장인은 도구 탓을 하지 않는다지만, 서툰 러너에겐 장비빨이 최고다.      



그날 이후, 자본주의에 푹 빠져들었다. 20만 원짜리 러닝화를 살 때 한참을 고민하던 내가, 30만 원짜리 러닝화를 사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얼마 뒤, 구하기 어려운 신발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는 핑계로 30만 원짜리 러닝화를 또 샀다. 무슨 신발을 또 샀냐는 아내의 비난에 나는 합리적으로 답했다.

“이게 진짜 구하기 어려운 거야. 이거 지금 바로 팔면 50만 원도 넘어!”

“확 진짜 갖다 팔아 버릴까 보다.”

혹여나 정말 팔아 버릴까 봐. 새 신을 신고 바로 동네 한 바퀴 달리고 왔다. 이제 더 이상 새 신발이 아니니 팔긴 어려울 거다.     



신발뿐만이 아니다. 달리기할 때 꼭 필요한 스마트 워치. 추운 겨울바람을 막아줄 바람막이. 얼어붙는 손을 보호해주는 러닝 장갑. 이마에 흐르는 땀이 눈에 들어가는 걸 막아주는 헤어 밴드. 발목 부상을 막아주는 러닝용 양말. 휴대폰을 보관할 러닝 벨트. 냉장고를 가득 채운 이온 음료. 아직도 저 얇은 천 조각이 왜 이렇게 비싼지 이해가 안 되는 싱글렛(민소매 티). 이 밖에도 내 소비의 대부분은 달리기를 위해 쓰인다. 나는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애쓴다.


“내가 예전처럼 격투기를 하거나, 크로스핏을 했다면? 회비가 매달 20만 원 정도 나가니까? 1년이면 240만 원! 그럼 러닝화가 8켤레니까 아직은 오히려 흑자네 흑자! 헬스장을 다녔다면 한 달에 10만 원이면 1년에 120만 원 그럼 러닝화가 4켤레니까 그래도 아직 흑자네 흑자!”     



좋은 장비의 장점은 오직 기능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다. 좋은 장비를 갖추면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더 빨리 달리고 싶고, 더 오래 달리고 싶어진다. 결국엔 달리기가 더 즐거워진다.      



그러니 다들

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

머리가 하늘까지 닿도록.

새 신을 신고 달려보자 휙휙.

단숨에 높은 산도 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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