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영 Feb 27. 2022

숫자로 뒤범벅된 날들

  눈이 떠졌다. 스마트폰을 누르고 시간을 확인한다. 눈을 시큰하게 하면서 또렷하게 보이는 숫자들

AM 05 : 30


 알람이 없이도 눈이 떠졌다는 건 충분히 수면을 취했고 내 몸이 아침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일 수도 있다. 이제 뇌를 깨워도 괜찮으니 눈이 떠졌을 것인데,  화면에 뜬 숫자들을 보는 순간 나는 급작스런 피곤함을 느낀다. 머릿속 계산기가 아주 빠르게 돌아가고 이내 생각한다.


'12시부터 누웠으니 고작 5시간 잔 거야. 너무 조금 잤어. 이러면 오늘 하루가  피곤하겠어. 더 자야 해. 나는 최소 7시간은 자야 몸이 덜 피곤한데 말이야, 게다가 오늘은 일요일이야.'


수면의 질보다는 양을 계산하고 다시 잠을 청해 보지만 잠은 다시 오지 않는다. 결국 침대 밖으로 나온다. 노트북을 켠다.  숫자로 뒤범벅인 날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여덟 살에 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부터는 늘 시험을 보고  점수와 등수라는 게 있었다. 국어는 몇 점,  수학은 몇 점, 그리고 반에서 몇 등, 전교에서 몇 등. 그렇게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관심 있으며 무엇을 할 때 행복한가 보다는 그 점수와 등수로 나를 이야기해야 했던 날들.


 "국어가 98점이냐? 국어에 소질 있구먼, 수학은 75점이야? 수학을 못하는 구만. 수학 안 좋아해?"

(수학을 더 못하긴 하지만 수학 좋아하는데요. 재밌어요.)'

"이 점수로는 OO대학교 OO과 가면 맞으니까 거기 원서 접수해라"

(저는 OO과 보다는 **과 가고 싶은데요.  저는 **쪽에 더 관심 있는데요)'

"0.2점 차로 11등이야. 0.3점만 더 맞으면 10등 되겠어. 그럼 합격이다."

( 0.2점이 부족하니까 실패했네요. 근데 공정하게 평가한 거 맞죠?)'



어른이 되고 사회에 나와서는 타는 차가 어디 거고 크기는 어떻게 되는지, 사는 집은 어느 동네에 무슨 아파트 사는지가 '내'가 된다. 차나 아파트도 이미 사람들 사이에선 암묵적으로 등수가 매겨진 상태다. 그 차를 어떻게 타게 되었고 그 아파트에 살면 어떤 점이 행복하고 좋은지는 어디에서도 말할 필요가 없어진 날들.


"거기 아파트 30년 넘었죠? 너무 오래됐고 평수도 엄청 작던데"

(오래되고 낡았지만 신혼이라 좋기만 해요. 바로 앞에 천변에 봄만 되면 벚꽃이 피어서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OO차 타요?  비싼 찬데~ 돈 많네. 부자네"

(엄청 노력해서 여기까지 왔어요. 누구 도움 없이 진짜 노력했어요. 저에 대한 보상으로 좋은 차도 한번 타보고 싶었어요. )

"자이 살아요? 거기 평수도 넓고 집값 비싸던데, 부자네요"

(자이여서 좋은 게 아니고, 바로 옆에 산이 있어서 산책로도 좋고요. 주변 풍경이 좋아서 살아요)



온라인 세상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더 많은 숫자로 뒤범벅이다. 블로그는 이웃 숫자, 일일 방문자 수, 총 방문자 수, 인스타는 팔로워 숫자, 좋아요 하트 숫자, 브런치는 구독자 숫자, 라이킷 숫자.  

도대체 숫자 아닌 게 없다.


온통 숫자다. 숫자.



혼자 조용히 책을 읽고 쓰는 게 좋아서 카페에 앉아 있던 날 생각했다. 점수도 등수도 지겹고, 아파트 평수도, 차 크기도 지친다 생각했던 날, 집 사진을 찍고 차 사진을 찍어서 올려놓고는 좋아요 '하트'가 눌러지기를 기다려지는 마음.. 이 마음의 정체는 도대체 뭐지?


이전 06화 걸으면서 느끼는 시간의 부피와 질량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