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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달래 Feb 21. 2024

우리의 결혼, 뭐가 문제였지?

EP.8. 별거


병원 대기표에 7명이 올려져 있다. 하나씩 순서가 바뀌어지며 이름이 한 칸씩 올라간다.

정희는 지난 월간 잡지를 휘적휘적 뒤적이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이 가보라고 하니 정기 검진도 받을 겸 가까운 단지 내 산부인과를 찾았다.

간호사가 이름을 부르니 진료실로 들어간다.

간단히 검사를 한 후 옷을 갈아입고 의사 앞에 앉았다.

의사는 별이상 없어 보인다며 암검사 결과는 일주일 뒤에 문자로 알려주겠다고 했다.


"저 선생님~궁금한 게 있는데요. 남편이 가라고 해서 오긴 왔는데요. 남편이 말한 이불에서 뭐가 옮겨서 비뇨기과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는데 그게 뭔지, 만약 그렇다면 그게 예방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예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어떤 상황인지는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머릿니나 사면발니 같은 경우는 밀접한 신체접촉으로만 옮겨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불에서 옮기는 확률은 거의 아주 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면 그 검사도 하시겠습니까? "

의사 선생님은 책을 읽듯이 담담하게 말을 하신다.

" 그 검사라니요. 뭐를 말씀하시나요?"

"성병검사입니다."

"네??"나는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띵했다.

성병이라니...

"그게 남편과 잠자리를 한 달 이상 하지 않았는데도 제가 검사를 받아야 하는 건가요?"

"안 하실 거면 남편이 치료를 하시는 동안은 가까이 안 하시는 게 좋습니다."

정희는 성병이라는 말에 조금 아니 많이 당황했다. 이제껏 한 번도 생각지도 않았던 두 음절의 단어!


남편이 당직실 이불에서 옮았다는 그게 성병이라는 건가? 그런데 의사는 신체접촉에 의해서만 된다고 하지 않은가?

그래도 남편을 그런 쪽으로는 철석같이 믿고 살았는데 늦게 아니 이른 새벽에 들어오는 이유가 밖에서 정희가 모를 불건전한 무언가를 하고 다녔다는 거네...


이제야  여자의 촉이 발동하다니...


절망이다


정희는 남편이 우스웠다. 아니 자신이 우스웠다. 순진하게 남편하나만 믿고 결혼을 저지른 자신을 미친년이라고 자책하며  남편의 목이라도 누르고 싶었다.

그 새벽에 들어와 무방비상태로 있는 정희를  무작정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했던 그 순간도 갑자기 떠올랐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배설이다. 끝내고 금새 코를 곯던 남자.

 "일주일은 옆에 안 오겠구나!!" 하며 안도의 숨을 쉬던 정희였다.

이건 정상적인 부부생활이 아니었다.


'이 병신, 그것도 모르고 나가서 남편 바람피울까 봐 하자는 대로 다 해줬었네!'

자신이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비참하게만 느껴졌다.

밤 12시가 넘게 들어오는 날이 많아졌을 때라도

못 산다고 이러면 헤어지자고 왜 한바탕  자살소동이라도 벌이고 악다구니라도 쳐서 더 이상 못하게 해야지! 바보멍청이같이 받아주며 6년이 넘게 살았냐고?


'정희야 왜 이렇게 사니~?'


이 상황에 저 남자랑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껍데기 같은 거를 붙잡고 살이 돋아 채워져 나가기를 바라며 저 남자랑 살이유가 없다.



그날 저녁 남편이 토요일이라  해가 있을 때 퇴근을 했다. 오자마자 단지 내 테니스코트로 운동을 한다며 옷을 갈아입고 있다.


"나 아이들 데리고 시골 가서 살고 싶어. 엄마한테 가서...

당신은 매일 늦게 들어오고 나는 아이들 데리고 너무 힘들어. 숨을 못 쉬겠다고.. 감옥에 갇혀서 사는 것 같아."

"나는 어떡하라고? 갑자기?"

운동화 끈을 묶다가 나를 바라본다.


"당신은 주말에나 아이들 얼굴 겨우 보고 살면서 뭘 어떡해?

마누라는 있으나 없으나이고 밥은 밖에서 잘 드시니 잠만 와서 자면 되잖아.

애들 보고 싶으면 주말에든 휴가 때든 왔다 가든지!"

남편은 현관에서 어정쩡하게 시선을 어디다 둘지 모르고 서서 듣고 있었다.

정희는 가까스로 병원에서의 의사의 말이 귓전에서 떠나지 않고 앵앵거렸지만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소리를 입밖으로는  꺼내지 않았다. 꺼냈다간 그만 살자라는 말이 뛰쳐나올 것 같았다.


입을 꾹 다물고 뒤돌아서서 설거지를 시작하며 눈물이 나오는 걸 가까스로 참고 최대한 담담하게

"당신은 내가 없으면 더 자유롭겠네~!?"

설거지 한 그릇을 건조대에 하나씩 쌓으며 정희는 말을 겨우 뱉는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갔다 와서 얘기하자며 도망치듯 나간다.


라켓을 휘두르며 머릿속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리석은 남편 ~

그날도 그 남자는 새벽에 곤드레가 되어 들어왔다.

아 당신이란 사람 정말 모르겠다.


마음속으로는 화산 같은 불덩어리가 솟구쳐 올랐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아이들이 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이 시점에 조금만 더 참자. 아이들이 너무 어리다.


정희는 남편이 잠든 것을 느끼자 트렁크에 담을 아이들 옷가지들과 필요한 것들을 주섬주섬 담기 시작한다.






내일이면 여기를 탈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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