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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달래 Apr 23. 2024

하마터면!

EP.7 담임선생님의 낡은 슬리퍼

국민학교 5학년 때입니다. 산골로 이사를 간 나는 모든 게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시골학교는 아이들이 공부를 잘 안 하는 것 같았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농사짓는 부모님들을 도와야 해서 논과 밭으로 다니며 풀을 뜯겨야 하고 소여물도 만들어 먹여야 하고 서울깍쟁이들과 노는 게 같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지저분한 아이들과 노는 게 조금은 꺼려졌습니다.


전학하고 첫 시험을 보았는데 전교에서 2등을 했더라고요. 1등은 반장인 남자아이였습니다. 서울서는 성적이 중상 정도였는데 시골에 와서 이런 결과를 보니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오호 이거 봐라 좀만 더 하면 1등도 할 수 있겠는걸 "

그러나 졸업할 때까지 1등은 항상 그 남자아이의 몫이었습니다. 상대가 되지 않는 아이였습니다. 1등을 따라먹으려고 노력하며 밤도 새우고 날이 밝아 오는 날도 많았습니다. 그 남자아이는 늘 축구만 하고 놀던데 아마도 머리가 좋은 모양입니다. 지금은  지점장이 되어 잘 살고 있습니다



1,2등을 다투던 나를 여자애들 사이에선 시선이 곱지는 않았고 쉬는 시간에 내 옆으로 와서 말을 걸고 자기네 집에 놀러 오라고 하고 교회에 나가 자고도 하고 주말에 시내에 놀러 가자는 친구들도 있는 반면 나와 경쟁을 하는 아이 몇몇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할 뿐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그 모든 아이들과 친구가 되고 싶었고 그래서 내가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었습니다.

"나는 너희들과 잘 지내고 싶어, 시골이 처음이거든 그러니 미워하지 말고 친하게 지내 자."

그러고 나서 나는 공부를 잘 하든 못하든 또 생김새가 못났든 잘났든 옷매무새가 누추하든 아니든 모든 친구들과 말을 걸고 푼수같이 격 없이 지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친구들에게 인기 있는 아이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담임선생님 앞 책상에 앉은 나는 선생님 갈색 슬리퍼가 거의 해어져서 발가락이 튀어나오려고 하는 것에 눈길이 갔습니다.

어린 나이에 그게 안쓰러워 보였는지 또 오지랖이 발동했는지

그날 집에 가서 엄마한테 말씀을 드렸습니다.

"엄마, 선생님 슬리퍼 하나 사드리면 좋겠어. 새끼발가락이 옆으로 나올라고 그래.."

며칠 후에 엄마가 5일장에 다녀오시면서 선생님의 키에 대충 발사이즈를 짐작하셔서 새 슬리퍼를 사다 주셨습니다.

신문지에 싸고 종이봉투에 넣은 신을 아무도 모르게 선생님 탁자밑에 갖다 놓았습니다.


선생님이 출근하고 한두 시간 수업을 하고 나서야 발견을 하신 모양입니다.

열어보더니 깜짝 놀라셔서 신문지로 둘둘 말은 종이 봉지를 들고

 "다들 주목!! 이거 누가 갖다 놨나?"

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손을 들까 말까 하다가 모기소리만 한 목소리로

"제가요...  엄마가 갖다 드리라고...."

그랬더니 선생님은 다시 봉투에 담으시더니 내 책상밑에다 놓아주셨습니다.

"다시 갖다 드려라. 감사하다고 맘만 받겠다고 전해드려라."

하시는 겁니다.


나는 창피하여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서 그 자리를 빨리 모면하고 싶었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건네주시는 선생님이 미웠습니다.

그냥 아무 말 없이 신으셨으면 창피함도 내가 받지 않았을 텐데... 선생님이 그날 이후로 무섭고 더 이상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겨울방학을 맞이했고 6학년이 되어 선생님과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지 40여 년이 흘렀습니다.

김영곤 선생님.. 시골에서 처음 만난 선생님.

세월이 흘러 몇 년 전에 시골 동창회가 30년 만에 열린다 해서 내려갔다가 그 선생님이 근처에 살고 계시다 듣고 몇몇 친구들과 선생님댁을 방문하기로 하였습니다

선생님을 꼭 뵙고 싶었습니다.

그때 일을 기억이나 하고 계실는지....

선생님은 두 아들을 출가시키고 사모님과 전원에서 작은 집을 짓고 살고 계셨습니다.

찾아간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시고 곶감과 수정과를 내놓으셨습니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지 많은 시간이 흘러서 어느새 선생님도 70이 넘으셨고 우리도 머리가 희끗한 중년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제지간의 정을 나누고 친구들 이야기를 하다가 잠깐 선생님이 말씀을 멈추셨을 때

선생님께 여쭈었습니다


"선생님 저 기억하세요?  77년도 즈음에 5학년 2반 김달래인데요 서울서 전학을 왔었는데 선생님.. 슬리퍼를 선물로 드린 아이예요 "

선생님은 저를 다행히 기억하시면서

"그 노래 잘하던 달래? 기억하고 말고.. 슬리퍼는 아마도.... 내가 그때가 첫 부임을 한 학교여서  다른 선물을 못하는 아이들 눈에 네가 미움을 받을까 봐 아마 다시 돌려드렸을 거 같다.

그때는 다들 어려울 때였거든..."

선생님은 내가 공부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는 아이로 기억하고 계셨고 그런 아이가 눈에 튀게 선물까지 갖고 오니 다른 아이들에게 질투나 시기를 받을까 봐 미리 걱정을 하신 것이었다. 


그제야  '선생님이 기억을 하시는 것과 나를 위해서 슬리퍼를 그렇게 돌려보내셨구나'하는 선생님의 깊은 마음을 알게 되었고 선생님이 나를 미워해서 그걸 돌려주신 게 아니었구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린 나이여서 그때는 헤아릴 수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마터면  모를 뻔했네요. 선생님의 깊은 속 뜻을...


그 당시 서울에서는 치맛바람이 불어서 케이크 속에 책 속에 촌지를 넣어 드리고 했던 일이 빈번했습니다.

다행히 내가 아이들을 키울 때는 그런 불미스러운 일들로 인해 말들이 많아지니 스승의 날에 학교를 쉬기도 하고 선생님들이 선물을 받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 선생님은 올곧은 선생님이셨습니다. 뭘 받았다고 더 이뻐하고 그런 말이 아예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선물도 안 받으셨던 것 같습니다.

우리 선생님 존경합니다. 스승의 날이 다가오니 해어진 그 슬리퍼가 떠오르네요.


카네이션을 들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이제는 사모님과 함께 산책하실 때 발이 편한 로퍼를 선물로 드릴까 합니다. 이제는 받으실 거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길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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