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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달래 May 14. 2024

DJ 박스는 내 놀이터

EP.10 버지니아울프를 음미했던 시절

목마와 숙녀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1974년도일까 국민학교 2학년 때 즈음 박인희 씨가 목마와 숙녀를  읊어주는데 왠지 쓸쓸하고 차분한 이 시를 음미하곤 했다.

그 무렵 한참 날리던 뚜아에 모아의 이필원 씨가 73년에 종로에 약속다방을 오픈했다. 다방 이름을 기억하는 이유가 있다.

어린아이가 무슨 다방타령이냐고 할 테지만 그 다방을 이모가 주인이 되는 바람에 나는 그 다방을  참새가 방앗간 다니듯이 놀러 다녔다.

물론 엄마랑 같이 갈 때도 있었지만 광화문에 있던  학교가  파하고 나엄마도 찾을 겸 거길 혼자 드나들었던 기억이 난다. 실은 그것은 핑계고 음악이 좋아서 음악을 들으러 종로로 뛰어나갔던 것 같다.


그때 다방은 주로 대학생들의 아지트였고 , 다방으로 들어가면 전면한층 높이 위로 박스가 있는데 레코드 판이 수백 수천 장 진열되 있었고  LP레코드의 지지직거리는 소리까지 멋있었다.


네이버에서  모셔옴


메모지에 신청한 음악을 사연과 함께 들려주는 멋쟁이 DJ가 있었다. 우리 사촌 오빠였다. 그 당시 군대에 가려고 휴학 중인 대학생이었는데 목소리가 좋아서 오빠가 멘트 할 때 목소리에 빠져있었고 오빠가 들려주던 6,70년대의 가요와 팝송들과 해석들이 재밌어서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


그때 내가 즐겨 신청했던 박인희 목소리목마와 숙녀.

그리고 팝 중엔 비틀즈,사이먼앤가펑클,카펜터즈,로보,나나무스꾸리이다.가사도 내용도 모르지만 들으면 좋아서 콜라 한 잔 먹으며 몇 시간을 그 DJ박스에 납작 누워만 있어도 저녁이 될 까지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었다.


포크전성시대의 완성자인 어니언스의 편지와 작은 새,김정호의 하얀 나비, 홍민의 고별, 박인희의 얼굴 등의 노래는 어린 나이지만 가사를 외울 정도로 좋았다.

DJ박스로 올라가려면 몇 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하고 유리문을 통과하면 입장이 가능하나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고 나는 이모의 눈을 피해 슬슬 기어들어가서 디제이 박스에 납작 엎드리는 자세로 있었다.


고개를 들면 손님으로 온 대학생 고객의 눈에 띄어 주목을 받거나 이모에게 날벼락을 맞기 문이다.

내가 박스에 들어가면 사촌오빠는 가끔 사탕이나 껌 같은 걸 주면서 입술에 조용하라며 ' 쉿  '제스처를 하고 오빠가 음악을 내보내고 나서 학교생활 얘기든 하였고 난 그 시간이 좋았다.


사촌 오빠는 지금도 부산에서 공연 기획자가 되어 음악 관련 일을 하고 계신다.

얼마 전 오빠랑 통화를 하다가 그때의 디제이박스에 대해 물으니 오빠는 또렷이 기억을 하고 있었고

"그때는 달래 네가 음악을 듣는 자세가 기특해서 오빠가  봐준 거다 "라고 하셨다.


그 영향을 받아서 인지 나는 그때 그 시절의 가요와 팝이 좋다.

그때 줄줄 외웠던 목마와 숙녀는  시의 내용도 분석할 나이가 못 되었어도 레이션 전반적으로 흐르는 음악이 서정적이라 좋았다.


버지니아 울프가 뭔지도 몰랐지만  서럽게 살다가 간 사람인가 보다 했다.

훗날 대학에 들어가 다시 버지니아울프에 대한 책을 읽다가 그녀의 생에 대해 알게 되었고


버지니아가 생전에 말한

 “명성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내가 죽으면 사람들이 과연 무슨 말들을 할까.”(1932년 2월 4일 자 일기 중에서)

이 문장을 기억하며 어린 시절의 그 버지니아 울프를 떠올렸다.


FM에서 흐르는 목마와 숙녀를 듣다가 타임머신을 타고 2학년 코흘리개 소녀로 돌아가 본다.



엄마가 계셨으면 그땐 그랬지 하며 이야기 나누었을 텐데 엄마와의 추억이 너무 그립다.



작가님들의 감수성 예민한  때엔 어떤 노래가 유행이었나요 나눠주세요.


그동안 고추 먹고 맴맴 달래의 연재는  오늘로 마무리됩니다. 읽어주시고 공감해 주신 따뜻한 작가님들 감사합니다.  새 연재 "혼조옵서예"도 관심 가져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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