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사의 변

by 수인


선의와 호감만이 오가는 세상을 꿈꾼다면 순진해도 이런 순진한 사람이 없겠지. 서로의 가면이 맞부딪치는 순간들이 계속된다. 여리디 여린 자신의 속내를 감추고 보호하기 위해 갑각류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찌르고 도망가고 또 방어한다. 회사에서 일어나는 일은 저 깊은 바닷속에서 벌어지는 생태 전쟁에 다름 아니다. 사실은 약한 사람들이 우위를 점하고자, 아니 적어도 도태되지 않고자 회사라는 곳만 들어서면 아등바등 전투 모두로 바뀐다. 이렇게 하루의 대부분을 회사에서 보내고 나면 진이 쏙 빠진다.


진심과 가식이 교묘하게 뒤섞인 채로 굴러가는 사회라는 덩어리 속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속해버린 제멋대로 생긴 나란 모양은, 삐죽삐죽한 나만의 생김새를 억지로 그 안에 몰아넣었다. ‘숨이 막혀! 답답해!’ 아무리 외쳐도 아무도 날 꺼내 주지 않았다. 나는 내 모양 한번 제대로 펼쳐보지 못하고 이대로 질식해 버리는 걸까. 발버둥을 쳤다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렇게 서서히 바닥으로 가라앉았을 때, <함정과 진자> 속의 진자처럼 거대한 칼날이 나를 향해 서서히 내려왔다. 나는 그 칼날을 피하고 싶었다. 머리는 피하라고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다시 날이 선채로 나의 모양을 유지하지 않는다면 필시 저 칼날에 내가 베어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죽음이라는 단어를 생각했다. 죽음을 생각하니 모든 게 쉬워졌다.


어린 시절, 열어놓은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바람에 나부끼는 하이얀 커튼을 본 적이 있었다. 그 미묘하게 움직이는 무생물에 나는 마음을 빼앗겼더랬다. 자신만의 몸짓으로 자연스러운 흐름대로 나부끼던 그 부드러운 율동이 내 뇌리에 언제고 남아 있었다. 인간이 직조한 그런 무생물조차 자연스러운 바람결에 나부끼는데 하물며 생물로 태어난 내가 이런 인공적인 것에 죽어가는 게 말이 되는 것인가?


나에게로 달려드는 칼날을 피하지 못하면 나는 함정에 빠져 죽는다. 함정을 용케 피해 달아나면 나를 향해 칼날이 무섭게 달려든다. 그래서 나는 벽을 허물고 나와야 했다. <함정과 진자>에서는 외부에서 벽을 허물어주지만 나에게는 그런 도움이 없었다. 내가 벽을 부수고 나와야 했다. 그저 나를 믿고. 조금씩 조금씩 손에 피를 흘려가며 부수었던 그 벽을 이제는 한순간의 힘으로 뻥 차 버리고 나와야 했다. 어느 날 그렇게 나는 나를 가두던 모든 것을 한 번에 무너뜨리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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