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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숙 Oct 22. 2023

짜파게티


비가 그치고 폭염이 시작됐다. 이틀 연속 폭염주의보가 내렸다. 푹푹 찌는 더위에 수영장 생각이 간절하다. 여기 마포는 수영 강습 신청이 은이 언니와 숙이 언니의 비보 콘서트 티켓팅 마냥 1분 만에 끝나버린다. 강습은 그렇다손 쳐도 자유 수영도 시간이 정해져 있고 그마저도 현장에서 선착순으로 접수를 해야 하는 터라 현실적으로 나 같은 직장인을 위한 수영장은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서울에서 보낸 두 번의 여름 동안 수영장에 간 것은 딱 두 번. 그마저도 작년 한 달 잠시 백수였던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영 말고 여름을 이길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그래서 터득한 나만의 여름 나기 방법, 홍제천을 달리고 찬물로 샤워하기. 여름에 온수로 씻는 건 다른 계절 보다도 욕실에 오래 머무르는 습기 때문에 아무래도 별로다. 그렇다고 찬물로 씻자니 아무리 폭염이라지만 알몸에 찬물을 끼얹는 건 춥다. 하지만 몸에 열을 낸 직후라면 얘기가 다르다. 달리기로 온몸을 달군 후 미처 땀이 마르기 전에, 그러니까 가슴골로 땀방울이 주르륵주르륵 흘러내릴 때 바로 옷을 벗어 재껴야 한다.

 방울방울 맺혀 있는 땀방울을 보면서 뿌듯함을 한번 느껴준 후 찬물이 솨 흐르는 샤워기에 얼굴을 갖다 댄다. 그렇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물을 뒤덮고 있으면 머릿속까지 개운해지는 기분. 제아무리 냉수라도 두렵지 않다. 물론 ‘읍… 뜹… 허…’ 같은 의성어를 내뱉으며 견뎌야 하지만 말이다. 냉수 샤워를 하고 있으면 어린 시절 등목 하던 오빠가 생각난다. 초등학생 김대원은 태권도를 3단까지 섭렵한 유단자였는데 엄마는 태권도를 마치고 집에 온 오빠에게 등목을 해줬다. 그때의 김대원 어린이도 나처럼 ‘읍… 뜹… 허…’ 같은 의성어를 내뱉었던 것 같다.

 여름을 이기기 위해 매일 같이 홍제천을 달렸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달리기를 하고 냉수에 몸을 갖다 대면 더할 나위 없이 개운하다는 것을 잘 알지만, 문제는 문밖으로 나가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운동복으로 갈아입기, 갈아입고 나서 밖으로 나가기, 한 단계 한 단계가 왜 그렇게 귀찮은 것인지…. '그래 이참에 운동량도 채우고 살이나 빼자.'와 '아 귀찮아. 정녕 이게 최선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 사이를 헤맨다. 그러다 하루는 내 동생 아연이 생각이 났다. 불과 3-4년 전 우리 집에 에어컨이 없던 시절, 덥다고 투덜거리던 아연이는 이대로는 못 살겠다며 간이 1인 욕조를 샀고, 더울 때마다 욕조에 들어갔다. 그래, 욕조… 욕조라…….


 “엄마! 나 물놀이할래!”


 어린이 시절, 여름을 알리는 우리 집 여름 공식 삼 대장이 있었다. 뉴슈가를 살짝 풀어 푹 삶아 낸 단짠단짠 하지감자, 사이다나 환타를 콸콸 부어 만든 수박화채, 그리고 물놀이.

 우리 남매는 물을 정말 정말 좋아했다. 우리 남매 어릴 적 사진첩을 보면 다섯 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이가 쨍한 분홍색 수영복을 입고 외할아버지 품에 안겨 계곡물에 입수를 하고 있다던가, 선캡으로 해를 가린 채 마치 인생을 두 번쯤 산 것 같은 태연한 표정으로 튜브 위에 동동 떠 있다던가, 울트라맨처럼 물안경을 끼고 허겁지겁 간식을 먹는다거나 하는 웃긴 사진들이 한가득이다. 매 여름 우리 가족은 주말마다 빨간색 큰 아이스박스, 작은 아이스박스를 먹을 것으로 가득 채워서 근교 계곡으로 떠났다. 주로 운일암반일암, 동상, 지리산을 돌려 가며 방문했는데, 우리는 엄마 아빠가 계곡에 자리를 채 펴기도 전에 “나 들어갈래!”를 외치고는 들입다 물로 뛰어들었다. 

 입술이 퍼렇게 질리고, 밤이면 다리가 철렁하고 내려앉는 꿈을 꿀 정도로 열심히 놀면서도 우리의 물놀이 욕구는 줄어들 생각이 없었다. 하여 엄마가 마련한 방안이 있었으니 바로 욕실 물놀이다.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욕조에 물을 한가득 받고 몸을 담그면 된다. 엄마가 욕조에 물을 받을 때면 욕실을 몇 번이고 들락날락하며 물이 다 찼는지 안 찼는지를 수시로 확인했다. 마음 급한 어린이들에게 욕조에 몸 담그기 전 깨끗하게 샤워하는 시간조차 너무 길게 느껴졌다. 지금은 무릎만 살짝 들어 올리면 들어갈 수 있는 낮은 욕조지만 어릴 때는 담을 넘듯이, 또는 아빠 등에 기어오르듯이 욕조에 올라타야 욕조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때의 기분을 떠올려 보면 어른 김은숙이 수영장에 입수하는 기분과 닮아 있다. 그만큼 욕조 물놀이는 신나고 설레는 일이었다.

 첫 욕조 물놀이 짝꿍은 오빠였다. 오랜 시간 동안 오빠였다. 샤워기와 수전이 달린 쪽이 오빠 자리, 누워 기댈 수 있도록 기울어진 쪽은 내 자리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금이 있는 것처럼 절반씩 자리를 차지하고서 몸을 담그고 놀았다. 처음엔 제자리에서 잠수 시합을 하거나 손장난을 하는 게 다였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꼬마들의 장난은 거칠어졌다. 기울어진 경사를 타고 미끄럼틀을 타기 시작했는데 욕조에 담긴 물이 절반쯤 사라질 때까지 번갈아 가며 미끄럼틀을 탔고, 사방 간 데로 물이 튀긴 욕실은 엉망이 되고는 했다. 그러다 오빠랑 물놀이를 할 수 없을 나이가 되었을 땐 넓게 욕조를 차지하고는 혼자 놀았다. 이상하게도 혼자 물미끄럼틀을 타는 건 영 재미없게 느껴져서 혼자 놀 때면 몸을 홱 뒤집어서 이구아나가 된 것 마냥 물에 엎드려 있기도 했고, 지루해질 때쯤 다시 몸을 뒤집어 경사면에 등을 대고 누워서 발로 물을 살짝살짝 차 올렸다. 그러다 스르르, 눈을 감은 채로 물속에 얼굴 전체를 담그곤 했는데 온 얼굴이 물에 잠긴 순간의 고요함과 평화로움이 좋았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아연이와 같이 욕조에 몸을 담그기 시작했다. 우리 사 남매 중 물을 안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만 그중에서도 아연이는 물을 미친 듯이 좋아했다. 아연이는 아주 어릴 적 김삿갓 계곡에서 튜브를 타다가 떠내려 간 적이 있는데 아연이에게는 그게 적당히 스릴 있는 물의 흐름 같은 것이었는지 소리 한번 지르지 않고 그대로 떠내려 가는 것을 아빠가 발견하고는 사활을 걸고 뛰어가 아연이를 구조하기도 했다. 아연이랑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욕실은 깔깔거리는 아연이 소리로 가득했다. 물에서 지칠 줄 모르는 김아연 어린이는 바가지로 머리에 물을 퍼붓고, 물총을 쏘고, 미끄럼틀 타는 것을 반복하면서 실컷 놀고는 쭈글쭈글해진 손을 자랑스럽게 내밀어 보이곤 했다. 할머니 손보다도 더 쭈글쭈글해진 손가락은 언제 들여다봐도 신기했다.

 손 마디마디가 퉁퉁 불 정도로 한바탕 놀고 나면 욕실 문이 열리면서 엄마가 등장했다. 엄마 손엔 언제나 쟁반이, 쟁반 위에는 짜파게티가 있었다. 엄마의 등장은 곧 짜파게티 먹을 시간을 의미했다. 짜파게티는 언제 먹어도 맛있다! 물에서 놀고 나서 먹는 짜파게티는 더 강렬하게 맛있다!! 엄마는 계곡에서 놀다 나오나, 욕조에서 놀다 나오나 항상 짜파게티를 끓여줬다. 짜파게티 먹을 시간이면 우리는 욕조 밖으로 나와서 당시 막내용 아가 욕조를 바닥에 뒤집어엎고 욕실 바닥에 앉았다. 간이 식탁이었다. 아가 욕조를 간이 식탁 삼아 짜파게티를 먹고 있으면 우리 집 욕실은 지리산 계곡 평상 마루가 되기도 했고, 운일암반일암 자갈밭에 펼친 파라솔이 되기도 했다. 어느 날은 소스를 흠뻑 머금어 불은 짜파게티였고, 어느 날은 국물이 자작하게 남아 후르릅 소스까지 마실 수 있는 촉촉한 짜파게티였는데 어느 쪽이든 맛있었다. 싹싹 비운 그릇과 아연이 입가에 범벅된 소스가 그것을 증명했는데, 그릇을 다 비운 우리는 물로 입을 쓱쓱 헹구고는 곧바로 욕조에 몸을 담갔다.


 물에 몸을 담가본 게 어언 1년은 된 것 같은데 몸 담글 수 있는 곳은 어디 하나 없고, 엉뚱하게 짜파게티가 먹고 싶어지는 날이다. 가만, 짜파게티를 마지막으로 먹은 게 언제지? 혼자 살기 시작한 후로는 짜파게티를 먹은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본가에서 지낼 때는 장 볼 때마다 짜파게티를 새로 채워놨었는데…. 그러고 보니 우리 집은 짜파게티를 항상 번들로 구입했었구나. 한 개 끓여서 혼자 먹는 1인용 음식이 아닌 가득 끓여서 접시에 나눠 먹는 가정용 요리 짜파게티. ‘오늘은 내가 짜파게티 요리사’하며 온 가족의 한 끼를 책임진다는 짜파게티 광고는 사실이었다. 아쉬운 대로 오늘은 짜파게티를 사서 딱 하나만 끓여 먹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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