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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숙 Oct 22. 2023

사과 도넛

옛날, 그 시절 컵으로 만들어 먹던 집 도나쓰!


 유튜브 영상 썸네일에 사로잡혔다. 언제 봐도 유쾌한, 몇 번이고 보고 또 봐도 웃긴 박막례 할머니의 새 영상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집.도.나.쓰!’ 네 글자가 기억 저편 잠자고 있던 장면 하나를 꿈틀 깨웠기 때문이다. 바닥에 신문지를 가지런하게 깔아 놓고 그 위에 반듯하게 서서 도넛을 튀기던 엄마의 뒷모습을 말이다.

 오빠와 내가 초등학생이던 시절에 엄마는 우리들 하교 시간을 맞춰 손수 간식을 준비하셨다. 사실 간식이라고 부르기엔 어딘가 적절하지 않아 보일지도 모르다. 어린이들을 위한 간식이라고 하면 으레 과자나 아이스크림을, 보다 건강한 간식으로는 과일, 빵, 주스 정도를 떠올릴 수 있겠지만 엄마의 간식은 이것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김치전, 부추전, 토스트, 두툼한 식빵 치즈스틱, 가래떡 구이, 수박화채, 미숫가루... 엄마가 준비해 주는 간식들은 한 끼 식사와 열량이 맞먹는 든든한 탄수화물 집합체였고, 학교 다녀온 어린이들을 위한 간식이라기보다는 뙤약볕에서 땀 뻘뻘 흘리며 수고하시는 농부들을 위한 새참에 더 걸맞아 보였다. 엄마는 다시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매일같이 재료 손질이며 조리며 하나같이 손이 많이 가는 새참을, 아니 간식을 오후마다 준비해 주셨다.

 사과 도넛은 우리 집 공식 집 도나스로 엄마가 만들어주는 간식 중 하나였다. 사과 도넛이 간식인 날이면 계단을 오를 때부터 냄새로 알아챌 수 있었다. 달달하고 포근한 도넛 튀기는 냄새가 진해질수록 성큼성큼 계단을 두 칸씩 올랐다. ‘아싸! 오늘은 도나쓰다!’

 “다녀왔습니다.” 신발을 벗음과 동시에 거실 바닥에 엎어지다시피 슬라이딩을 하면 부엌에서 도넛을 튀기던 엄마가 뒤를 돌아본다. “왔어? 손 씻고!”


 엄마는 항상 척추를 곧게 편 반듯한 자세를 유지했는데 도넛을 튀길 때도 마찬가지였다. 연보라색 민소매를 입고 반듯하게 선 채 기다란 튀김 젓가락으로 휘휘 도넛을 저어가며 도넛을 튀겼다. 난 재빠르게 손을 씻고 위험하지 않게 살금살금 엄마 옆으로 간다. 흥분을 주체 못 하고 설레발을 치다가는 대형 사고가 날지도 모르기 살금살금 걷는 게 포인트다. 오빠와 만두를 굽다가 집을 태워먹을 뻔했을 때 몸에 새긴 교훈이다. 주방은 언제나 안전이 제일이다.

 가만히 서서 노란 튀김 냄비 안에서 튀겨지는 도넛을 보는 게 좋았다. 뽀글뽀글 작은 기포를 내며 바글바글 소리와 함께 노랗게 익어가는 도넛을 볼 때면, 유치원 시절 집에서 기르던 올챙이를 내려다볼 때의 기분 비슷한 게 느껴졌다. 도넛이 다 튀겨지면 차례로 건져 키친타월이 깔린 넓적한 대나무 채반에 건져냈다. 바삭한 도넛들이 부딪히면서 내는 까슬까슬한 소리가 좋았다. 

 채반에 건져진 도넛을 잽싸게 한입 왕 베어 물고 싶지만 그럼 입안이 온통 화상을 입고 말 것이다. 방금 튀긴 도넛은 매우 뜨겁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갓 튀긴 도넛을 참아내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바삭해 보이는 노릇한 자태와 달큰한 냄새의 유혹이 강력하다. 침을 꿀꺽꿀꺽 삼키며 열기가 빠져나가길 기다리다가 어느 정도 됐다 싶을 때 도넛 위에 백설탕을 솔솔솔솔 뿌려준다. 도넛에 남아 있는 열기 때문에 설탕 입자들이 안전하게 도넛 표면에 안착한다. 이제 먹기만 하면 된다! 여전히 뜨거운 도넛을 손가락 끝으로 받쳐 들고 한입 베어 물면 바삭한 식감과 까슬까슬한 백설탕 입자가 달달하게 입안을 감싼다. 뒤이어 폭신한 듯 파삭파삭한 빵이 입안을 가득 채우는데 0.5cm 정도의 정사각형 크기로 썰어 넣은 사과가 중간중간 씹히면서 맛을 더했다. 

 입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꿀꺽하는 순간까지, 달콤함으로 시작해서 달콤함으로 끝나는 사과 도넛은 뭐니 뭐니 해도 첫 입이 가장 맛있었다. 갓 튀긴 도넛의 바삭하고도 기름진 표면과 입에 닿자마자 사르르 녹아내리는 백설탕의 조합. 나는 대나무 채반에 한가득 쌓인 도넛 더미를 슬쩍슬쩍 뒤적이면서 가장 맛있어 보이는 도넛을 집어 들고선 앞니로 깨작깨작 설탕 묻은 표면을 갉아먹다가 크게 한입 왕 베어 물어 목구멍 가득 밀어 넣는 걸 즐겼다. 적당한 퍽퍽함으로 목이 막힐 즈음 우유를 들이켜면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가장 맛있게 생긴 도넛을 고르는 일부터 말이다.


 박막례 할머니가 도넛 가루에 계란과 우유를 풀어 반죽을 만들고 밀대로 밀어 도넛을 만드는 모습을 보다 생각했다. ‘어? 나는 엄마가 도넛 반죽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한 번도 없네?’ 박막례 할머니는 언제나 그렇듯 신나게 도넛을 만드셨다. 추억에 잠기기도 하시고, 역할극을 하기도 하시고, 손녀 유리 PD님과 투닥거리기도 하시면서 말이다. 할머니를 보며 생각했다. 엄마는 어떤 마음으로 도넛을 만들었을까? 어떤 마음으로 반죽을 섞고 동그랗게 도넛을 빚었을까? 학교에 간 우리가 무탈하기를 기도했을까? 손을 번쩍 들고 발표하는 어린이를 기대했을까? 조잘조잘 친구들과 노는 어린이를 그려보았을까?

 초등학교 저학년이 지나면서 더는 사과 도넛을 먹을 수 없었다. 막내가 태어나기도 했고, 막내가 어린이집에 갈 무렵 엄마가 다시 일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꼭 그것 때문이라고는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후에도 김치전, 부추전, 토스트, 치즈스틱, 가래떡구이, 수박화채, 미숫가루는 계속 먹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과 도넛이 손이 아주 많이 가는, 성가신 녀석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스무 살이 훌쩍 넘은 우리 막내는 엄마의 사과 도넛을 먹어 보지 못했겠구나. 언젠가 막내에게 사과 도넛을 한번 만들어줘 봐야겠다. 신문지 위에 반듯하게 선 채로 도넛을 튀기던 엄마의 마음을 어림짐작 해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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