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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u Oct 28. 2024

시가 주는 위안 (박경리)

한국 문단의 큰 별과 시를 통한 조우



시는 문인들에게는 꼭 거치는 필수코스 일까? 많은 작가들의 시집이 종종 눈에 들어옵니다. 소설을 쓰던 작가님들의 시집도 많이 접하게 되고 최근 북튜버로 유명한 김겨울 작가님도 시집을 내셨다고 하네요. 글을 쓰는 많은 작가들이 시집도 출간하는 모습을 보자니 글을 쓰는 사람에게 시가 주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장편소설 중에서도 손꼽히는 ‘토지’라는 작품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박경리 선생님도 문단 데뷔 전 159행의 장시를 근무하시던 은행의 사보에 발표하셨다고 합니다. 김동리 선생님을 통해 문단을 나오실 때도 시집을 들고 오셨다니 문학의 꽃은 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박경리 선생님의 등단을 도운 김동리 시인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소설이 아닌 시를 쓰는 걸 즐기셨다는 걸 처음 알게 되어 놀랍고 반가웠어요. 많은 집필 활동을 하셨던 선생님께서는 독립운동을 하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한 남편과 갑작스럽게 아들까지 잃었버리는 일까지 얼마나 힘들고 모진 세월을 사셨을지 짐작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꾸준히 좋은 작품을 많이 쓰셨다니 감사함과 감동이 동시에 번져옵니다. 힘들고 좌절하고 견디기 힘들 때 시가 위안이 되셨다는 작가님의 시집을 하나하나 눈에 담아 보았습니다.




시집 속 自序에 남아있는 작가님의 고단함의 위로가 되어준 시에 대해 이렇게 언급해 주셨어요.



시를 쓴다는 것은 큰 위안이었다.
자정적自淨的 과정이기도 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송두리째 빼앗겼던 저 옛날 일제시대,
학교라는 조직 속에서 몰래 시를 쓴다는 것이 유일한 내 자유의 공간이었고
6.25 고난의 세월 속에서는 나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어주기도 했다.











시는 읽는 사람에게도 쓰는 사람에게도 안위를 내어 줍니다. 시를 읽고 있노라면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손길을 느낄 수 있듯이 시를 쓰는 과정들도 작가의 마음을 보듬어주는 공기이고 바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박경리 선생님의 시가 유독 편하게 읽히고 좋았던 이유는 간결함이었습니다. 늘어지거나 길어지지 않게 편안하게 이야기하듯 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처음 시를 마주 하던 그때, 눈이 밝아짐을 느꼈습니다. 시를 곱씹어 읽노라면 작은 TV상자 속에서 흘러나오던 옛이야기가 그려지곤 합니다. 시골에 사시던 할머니 댁에 놀러 가면 볼 수 있었던 문이 달려있던 TV가 들어있던 상자의 추억이 있습니다. 할머니께 가면 마주할 때마다 신기했던 그 문을 열고 TV를 켜면 펼쳐졌던 유난히 새롭게 느껴지던 세상 이야기들, 자려고 누우면 조곤조곤 들려주던 옛이야기를 듣는 기분이 들곤 했습니다.



대추와 꿀벌


대추를 줍다가
머리
대추에 쳐박고 죽은
꿀벌 한 마리 보았다

단맛에 끌려
파고들다
질식을 했을까
삶과 죽음의
여실如實한 한 자리

손바닥에 올려놓은
대추 한 알
꿀벌 반 대추 반
눈이 시리도록 푸른 가을 하늘




박경리 선생님의 시집을 읽다 보니 88년에 발행했던 시집 <못 떠나는 배> 부터 <도시의 고양이들>, <우리들의 시간>, 유고 시집인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까지 시집을 여러 권 내셨다는 사실을 알고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거대한 장편 소설을 집필하신 것만도 존경스러웠는데 시까지 이렇게 많이 쓰셨을 줄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지막 유고 시집은 선생님의 따님이 어머니의 습작을 모아 만들 책이라 더 아련하게 읽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 주변에 관한 이야기,  풍경에 관한 이야기 들에 대해서도 시를 쓰셨지만 일제강점기와 6.25를 지나오시며 역사 속 경험하신 이야기들도 시로 풀어져 있었습니다. 읽기만 해도 마음이 저릿한 시 한 편 같이 읽어보면 합니다.


조국


허리 짤리운
우리 산천에
미국 군대가 있고
어찌 또 다시
우리 산천에
일본이 오는가

무덥던 여름
장농 깊은 곳에서
숙고사 연분홍 치마
은조사 흰 적삼
소중히 꺼내어 입고
시골 신작로 따라
국민학교 운동장 가던 새색시

모두 어우러져서
한 덩어리가 되어
울음 섞고 눈물 뿌리며
만세를 불렀다

이제는
오손도손 우리끼리 살겠구나
내 땅에 와서 내 겨레 가슴에
숱한 못질을 하던
그들이 가는구나

부모형제를 찾고
우리말 찾고
내 이름도 찾고
아아 내 옷도 찾아서
이제 찬란한 햇빛 아래
내 산천을 바라보리

새색시 백발이 되었고
세상만사 다 변하였는데
그 때 눈물과
그 때 기쁨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시래기죽에
물 한 그릇 더 부어서
배고픈 나그네
시장끼 달래주던 시절

헌옷 깁고
실 물어끊으며
땀좀 닦고 묵으소
어머니가 말했었지

기막힌 그 시절은
가난이던가
진정 기막힌 그 시절은
不幸이던가






유고 시집을 펼치면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박경리 선생님 따님이 쓴 서문이 가슴을 아리하게 합니다. 선생님이 생애 마지막까지 손수 쓰신 시들을 하나하나 읽으며 시집으로 엮는 과정에서 어머니를 그리는 절절함이 와닿았습니다. 시집을 읽다 보면 ‘가을’에 관한 시에 대해 따로 묶여 있는 파트가 따로 있어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가을에 만나본 박경리 선생님의 ‘가을’ 이라는 제목의 시라니. 인연을 목도한 기분이 아마 이럴까요?





가을


방이 아무도 없는 사거리 같다
뭣이 어떻게 빠져나간 걸까
솜털같이 노니는 문살의 햇빛

조약돌 타고 흐르는 물소리
나는 모른다. 나는 모른다. 그러고 있다
세월 밖으로 내가 쫓겨난 걸까

창밖의 저만큼 보인다
칡넝쿨이 붕대같이 감아 올라간 나무 한 그루
같이 살자는 건지 숨통을 막자는 건지

사방에서 승승 바람이 스며든다
낙엽을 말아 올리는 스산한 거리
담뱃불 끄고 일어선 사내가 떠나간다

막바지의 몸부림인가
이별의 포한인가
생명은 생명을 먹어야 하는

원죄로 인한 결실이여
아아 가을은 풍요로우면서도
참혹한 계절이다 이별의 계절이다




시집을 한 권 읽어 내려가면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 들곤 합니다. 기쁨과 슬픔, 고통과 연민이 다양하게 들쑥날쑥 거리는 흐름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박경리 선생님의 시집들은 잔잔했어요. 마음속 호수에 유유히 떠다니는 시로 만들어진 배를 바라보는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유고시집이란 단어 때문인지 시들의 느낌 때문인지 다른 시들 보다 조금 더 슬프고 외로운 느낌이 종종 들었습니다. 소설이 아닌 시로 만나 본 박경리 작기님의 시집에서 시로 표현된 노래인 듯 옛이야기인듯한 시를 읽으며 가을이 깊어감을 느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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