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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u Oct 16. 2024

한강에 흐르는 시

소설 대신 시를 읽겠어요


노벨상에 빛나는 한강 작가님께서 서랍에 넣어 두신 저녁을 두근대는 마음으로 새벽 어스름에 꺼내 읽어 봅니다. 흐르는 강을 그리워하는 걸 아는지 빽빽한 아파트단지들 시이사이로 비가 투두둑 내리고 있어요. 가만히 내리는 빗방울을 바라보다 아침에 늦게 오는 새벽의 하늘은 컴컴하기만 한데 자정을 넘긴 하늘과는 다른 색입니다. 커피 한 잔을 따뜻하게 내려 들고 가만히 시집을 열었습니다.



책을 사랑하고 작가님들을 좋아하는 애독자로 노벨상이 그토록 바라던 우리나라 작가님이라니 너무 흥분되고 기뻤습니다. 내가 읽어봤던 책을 썼던 작기님이라니 믿어지지가 않고 꿈을 꾸는 느낌에 가슴 설레었습니다. 마치 내 일인 양 소리를 지르고 설레고 흥분했더랬지요 정작 한강 작가님은 수상소감마저 차분히 말씀하시던데 말입니다. 흥분이 가라앉고 나서 생각해 보니 제가 처음 접한 책이 ‘채식주의자’였어요. 예쁘고 알콩달콩한 로맨스나 서정적인 서사만 좋아하는 저에게는 가히 충격적인 내용이어서 한동안 책을 멀리 했던 기억이 나요. 책을 통해 위로와 평안을 얻는 사람인데 힘들기만 했던 독서였습니다. 노벨상으로 전 국민이 들썩이는 가운데에서도 기쁨과 감동스러운 마음과는 별개로 다시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 한강 작가님의 소설들을 기쁨에 취해 다시 읽어볼까 고민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 www.nobelprize.org 공식사이트 에서 ]






혼돈의 어둠 속이라도 숨 쉴 수 있는 한 줄기의 빛이 있게 마련이지요. 한강 작가님은 시로 활동을 시작하신 소설가 이전에 시인 이셨어요. 그래서 모두가 나누는 노벨문학상의  기쁨을 소설 보다 시집으로 먼저 한강 작가님의 작품과 조우했습니다. 조용한 음성을 지니신 작가님이 천천히 읽어주실 것 같은 시들로 소설과 조금은 다르게 읽기 힘든 시가 없어 제가 끝까지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고요한 새벽을 좋아하는 사람이며 아침을 깨우는 구름사이로 비춰오는 얇은 햇살의 반짝임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홀로 깨어있는 듯한 적막함을 깨고 노래를 듣는 것처럼 시를 읽으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새벽에 느릿느릿 안 보이는 눈을 조금씩 비벼가며 살금살금 읽어 보는 ‘새벽에 들은 노래‘


새벽에 들은 노래

봄빛과

번지는 어둠

틈으로

반쯤 죽은 넋

얼비쳐

나는 입술을 다문다

봄은 봄

숨은 숨

넋은 넋

나는 입술을 다문다

어디까지 번져가는 거야?

어디까지 스며드는 거야?

기다려봐야지

틈이 닫히면 입술을 열어야지

혀가 녹으면 입술을 열어야지

다시는

이제 다시는



새벽에 눈을 뜨면 부정확한 느낌이 스쳐갑니다. 왜 벌써 인가 싶지만 몇 년 전부터 눈을 뜨고 바로 글자를 읽으려 하면 글씨가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눈을 반쯤 뜨고 일어나 밤새 감았던 눈을 살살 문지르며 졸음을 쫓아 봅니다. 미지근한 물 한잔에 밤새 갈증을 씻어내고 고요히 혼자 앉은자리에서 시집을 펼쳐 들어 봅니다. 긴 시를 단숨에 읽어가기보다 한숨씩 천천히 읽어 내려가며 편안한 숨으로 내쉬며 읽고 들이쉬며 음미해 봤어요,




소설만큼 어둡고 길고 자세하게 상황들이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시집도 밝은 시들보다 조금은 어두운 심연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줍니다. 잠시 시 안의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 다시 밝은 해를 향해 나와 기지개를 켜봅니다. 조금씩 햇살을 머금으며 밝아오는 하늘을 한 번 바라보고 ‘거울 저편의 겨울 2’을 읽어 봅니다.



거울 저편의 겨울 2

새벽에
누가 나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인생에는 어떤 의미도 없어
남은 건 빛을 던지는 것뿐이야

나쁜 꿈에서 깨어나면
또 한 겹 나쁜 꿈이 기다리던 시절

어떤 꿈은 양심처럼
무슨 숙제처럼
명치 끝에 걸려 있었다

빛을
던진다면

빛은
공 같은 걸까

어디로 팔을 뻗어
어떻게 던질까

얼마나 멀게, 또는 가깝게

숙제를 풀지 못하고 몇 해가 갔다
때로
두 손으로 간신히 그러쥐어 모은
빛의 공을 들여다보았다

그건 따뜻했는지도 모르지만
차갑거나
투명했는지도 모르지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거나
하얗게 증발했는지도 모르지만

지금 나는
거울 저편의 정오로 문득 들어와
거울 밖 검푸른 자정을 기억하듯
그 꿈을 기억한다.





해가 점점 모습을 드러내려 꿈틀대면 아이들도 하나둘씩 잠에서 깨어납니다. 유난히도 힘들었던 아이는 여전히 힘든 상황의 연속이고 어느 하나 특별하지 않고 고요했던 아이는 여전히 고요함을 유지합니다. 같이 자고 같이 먹고 같은 걸 배워도 너무 다른 두 아이지만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고 보살피는 게 엄마 마음입니다.


괜찮아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버릴까 봐
나는 두 팔로 껴안고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거짓말처럼
아아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
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 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



시를 읽으면서 자꾸 눈물이 새어 나왔습니다. 하루에 단 4시간 저녁잠을 자고 나면 나머지 20시간을 품에 안겨 있어야 하는 신생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마를 바라보던 아이를 밤새 아이를 끌어안고 매일 밤을 거실에서 수천번 원을 그리며 울음을 삼키고 노래를 부르던 제 모습과 겹쳐졌거든요. 그때 수도 없이 혼자 중얼거리며 그런 상황과 이렇게나 예민하고 힘든 아이가 서글프고 원망스러웠습니다.  이제와 뒤늦게 후회를 합니다. 괜찮아 괜찮아 아가 다 괜찮아 엄마가 있어 다독여줄걸 그랬다고. 이미 엄마보다 성큼 큰 아이를 보면서 가슴이 저릿한 아침을 맞이합니다.




소설도 에세이도 깊은 울림을 주기도 하고 분노를 주기도 눈물을 흘리게도 만들어 줍니다. 시도 더 깊은 감정들을 자주 만져 주곤 합니다. 사랑을 고백하는 환희에 차 노래를 같이 부르기도 하고 억누른 화를 폭발시키기도 하고 생활 속에 스며든 절절한 이야기들이 가슴을 요동치게 합니다. 긴 글과 상황 묘사들이 주는 감동도 크지만 짧지만 깊숙이 그려낸 서사들도 마음을 울리게 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많은 기계들의 품에서 벗어나 차분한 마음으로 시를 읽으며 함께 새벽을 열어보는 건 어떨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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