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을 다녀서 규칙적인 취미 시간을 마련해야겠다고 결심은 했으나 무엇을 배울지는 정하지 않았다. 일단 주위에 있는 학원을 다 찾아봤다. 그중에서는 커피를 마시며 그림을 배울 수 있다는 성인 취미 미술학원도 있었고 미술 쪽으로 나갈 수 있게 도와주겠다는 학원도 있었다. 취미라 해도 전문적인 지식부터 가르치겠다는 학원, 아이들 미술학원과 성인 미술학원을 겸하는 것 같은 학원, 시에서 운영하는 저렴한 미술 강좌까지……. 선택지는 정말 다양했다.
이쯤 되면 내가 원하는 조건을 세워서 좁혀나가야 했다. 첫 번째는 바로 물감을 써서 칠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정해진 커리큘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원하는 그림을 가져오면 그걸 그리는 수업도 많았으나 '원하는 그림'을 찾는 것도 내게는 일이었다. 그리고 정말 내가 원하는 그림이라면 초보가 따라 그리기 참 어려워 보이는 그런 작품들뿐이라 일찌감치 접어두었다.
그 결과 조금 의외의 수업을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민화 수업이었다.
민화 수업
민화 수업의 경우 가르치는 곳이 의외로 많다. 특히 시마다 있는 문화강좌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다니기로 결심한 건 5월이라 이미 시작해서 진행 중인 강의가 많았다. 그리고 3개월 정도 유지되는 그 강의가 끝나고 나면 다음 단계로 이어지는 수업이 마땅치 않았다. 기초와 심화 정도로 구분되는 정도이고 커리큘럼이 명확하지 않아서 나와 맞지 않았다.
학원의 경우 일주일에 한 번 수업에 개인별 진도였다. 원하는 시간만 하고 갈 수 있다는 점에서 마음에 들었다. 곧바로 전화를 해 등록 예약을 하고 찾아가니 여러 수업들을 진행하는 곳이었다.
처음 도착해서는 화선지에 먹선을 몇 번 긋고는 바로 밑그림 본을 따기 시작했다. 본뜨기는 그림을 종이 아래 두고 선을 따는 것을 의미한다. 처음에는 화선지에 선을 따보다가 옻지로 옮겼다. 먹선을 긋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는데 모든 선을 일정한 굵기로 그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꽃의 경우 선을 아주아주 가늘게 그려야 했다.
선을 다 긋고 나서는 바로 채색에 들어갔다. 민화의 경우 한 번 색을 올리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아래 사진의 꽃의 경우에도 그냥 흰색으로 칠한 것처럼 보이지만 호분을 두세 번 올린 상태다. 연잎은 연꽃보다 훨씬 많은 색을 올렸다. 연한 백록색을 올리고, 청색을 점점 짙게 만들어서 차례대로 올리기 시작했다. 그다음에는 역방향으로 갈색이 섞인 녹색을 두어 번 올렸다.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과정이었는데 단순히 면적을 채우듯 칠하는 게 아니라 바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바림은 그라데이션과 비슷한 느낌의 기법인데 한쪽을 짙게 하고 다른 쪽으로 갈수록 엷어지게 하는 방법이다. 바림붓을 쓰면서 강사님이 몇 번이나 시도를 보여줬으나 붓을 쥐는 세기와 종이에 닿는 힘 등등 고려해야 할 점이 많아 따라 하기 어려웠다.(지금도 자신이 없는 게 바로 이 바림이다...)
연꽃에 분홍색을 올리고 연꽃의 테두리를 호분 섞인 연분홍으로 그리고 나니 기나긴 연화도가 완성되었다. 이 작품의 크기는 크지 않은데(15x20cm) 하루에 끝내지 못하고 다음 수업까지 해야 할 정도였다. 아무래도 여러 번 바림을 하다 보니 쉽게 끝나지 않는 작품이었다.
여담으로 이날은 첫 수업인데 비해 정말 바림을 많이 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가서 더 큰 크기의 연화도를 그릴 때에는 잎 하나에 여덟 번 이상 바림을 했다. 첫 수업이라 쉬운 편이었던 모양이다.
* 완성된 작품은 액자에 잘 넣어서 보관 중이다.
완성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