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
아이 영어 수업이 끝나고 곽지 해수욕장에 왔다. 날씨가 흐렸지만 바닷가에는 물놀이하는 아이들, 모래놀이하는 아이들, 조개를 줍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런데 날씨 때문인지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다람쥐 통처럼 생긴 테이블에 짐을 놔두고 돗자리하나 조개 담을 커피컵 하나 들고 내려왔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급한 대로 돗자리를 뒤집어쓰며 비를 피했다. 하늘은 맑고 때로는 햇빛이 비치는데도 비가 쏟아지는 것을 보니 대기가 불안정한 것 같다.
아이들은 순식간에 비가 그치자 조개를 잡으며 더 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오후 시간이었음에도 바닷물도 밀려드는 것 같아 철수하기로 했다. 다시 세찬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다 같이 돗자리를 뒤집어쓰고 영차영차 게걸음으로 모래사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비를 피해 짐이 있는 다람쥐통으로 이동해야 한다.
둘째는 모래가 신발에 들어가자 다리 아프다고 안아달라고 징징거리기 시작한다. 돗자리 안 쓴다고 비 맞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말 안 듣는 둘째를 들춰 메고 뒤집어쓴 돗자리를 잡고 걸음을 빨리 옮기기 시작했다. 드디어 도착한 아지트.. 상황은 처참했다. 통나무 지붕에서 비가 쏟아졌는지 테이블에 올려둔 짐은 다 젖어 있었다. 돗자리 하나에 의지해 비를 맞지 않으려고 열심히 이동했건만 결국 우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 하나 없이 비에 다 젖었다.
힘들게 이동했는데 통나무 테이블에 도착하자 비가 그친다. 허무하다. 그냥 바닷가에서 비 그칠 때까지 돗자리 밑에서 버틸 것을 그랬나 보다. 아이들은 다시 바닷가에 내려가서 놀겠다고 한다.
아쉬워도 어린 조카도 있고 다시 내려가긴 힘들 것 같아서 맑은 날 다시 오기로 하고 철수했다. 비가 오니 카페나 실내 관광지를 갈까도 했지만 갈아입을 옷을 챙겨 오지 못한 데다 옷이 다 젖어서 에어컨 바람을 쐬면 감기에 걸릴 것 같다. 오후 3시 30분.. 숙소를 가기에는 시간이 애매하다. 드라이브를 하기로 했다.
작년 겨울에 썰매 타러 왔을 때 지나쳤던 어리목이 생각났다. 정상에 주차장도 있고 휴게소도 있었는데 곽지 해수욕장에서는 24킬로미터 정도였다. 드라이브 코스로는 제격이었다.
음.. 운전을 하고 한라산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데 비가 더 심하게 내린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아 와이퍼 속도를 최대한 높였다. 뒷좌석에서 어린 조카가 울기 시작한다.
라디오를 틀었다. 슈베르트 연가곡이 흘러나온다.
창 문 밖은 폭우가 쏟아지는데 노래는 한가롭고 평화롭기 그지없다. 부조화스럽다. 세 글자가 생각이 났다. '날궂이'
배가 고픈 아이에게 노래는 소용이 없었다. 빨리 정상에 있는 휴게소에 도착해야 한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내가 기억하는 어리목 휴게소가 아니었다. 주차장만 덩그러니 있고 어리목 올라가는 가파른 등산 코스만 보였다. 숙소로 돌아가야 했다. 차를 돌렸다. 그런데 방향을 잘못 잡았다. 반대편 중문 가는 방향이었다.
이차선 도로에 굽이굽이 구부러진 길이라 차를 돌릴 수 없었다. 숙소까지 40km가 넘는다고 네비에 뜬다. 기름은 150km 갈 양밖에 남지 않았다. 내 차는 주유소 찾기가 어려운데 걱정이 컸다. 다행히 차를 돌릴 수 있는 갓길을 찾았다.
차에서 조카를 먹이기로 했다. 조카는 우유를 허겁지겁 먹기 시작한다. 세찬비가 쏟아진다.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다. 차들이 많이 지나다니지 않는 곳, 갑자기 밴처럼 생긴 렌터카가 내 뒤쪽에 주차를 한다. 불안한 마음이 든다. 비가 쏟아지는 숲에서 무엇인가 튀어나올까 봐 무섭기도 했다. 조카의 허기만 달래고 다시 출발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내려가는 길에 150km 남았던 주유량이 갑자기 230km까지 늘어난다. 엔진이 꼬불쳐둔 기름을 토했나 싶다.. 주유소도 못 찾았는데 다행이었다.
어리목 정상에서 제주시로 내려가는데 다행히 비가 잦아든다. 어리목은 한라산 정상에 가까운 곳이라 세찬비에 그대로 노출이 되었나 보다. 신비의 도로에 도착했다. 길이 거꾸로 보이는 도깨비 도로라는데 이상하게 나는 한 번도 착시 현상을 겪은 적이 없다. 나에게는 최면이 안 통하나 싶다.. 제주에 올 때마다 들렀던 제주도립 미술관을 지나 숙소에 가는 길.. 이번에는 조카가 잠이 온다고 닭똥같이 굵은 눈물을 흘리며 운다. 비는 또 쏟아지고 빨리 숙소에 돌아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드디어 도착했다.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다사다난했던 하루가 끝났다. 이런 경험 언제 다시 하겠냐 싶지만 다시 겪고 싶지는 않다. 뉴스에 보니 전국이 물난리에 홍수까지 난 기사를 보며 이만하기 다행이고 무사히 도착한 것에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