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산다는 것

by 예서연

4년 만에 딸과 함께하는 주말 약속을 잡았다. 그런데 뭘 해야 할지 막막했다.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이가 어떤 걸 좋아하게 되었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내 기억 속 사랑이는 4학년 아이로 남아있었고, 어느새 중학교 2학년이 된 딸은 내가 아는 모습과는 완전히 다를지도 몰랐다.


나는 집과 회사, 학교, 근처 카페만 맴도는 생활을 해왔기에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그 동네에 살고 있는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인은 딸이 좋아했다며 뮤지엄 헤이를 추천했고, 사랑이도 가고 싶다고 했다. 도넛이 너무 맛있다며 강력 추천을 한 카페 URL을 보내주었더니, 도넛을 좋아한다며 거기도 가고 싶다고 했다.


두 곳을 확정한 후, 네이버에서 헤이리 지도를 열고 갈 만한 곳을 추려봤다. 미술관과 박물관 등의 URL을 보여주며 아이에게 고르게 했더니, 오르골 만들기만 선택했다.


"다른 거는 안 가고 싶어? 도예체험도 있고, 가죽공예도 있는데."

"음... 괜찮아."

"정말? 시간 많아서 다른 곳에 가도 되는데."

"괜찮아."


그 답에서 아이의 조심스러움이 느껴졌다. 혹시 비용 부담을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정말 관심이 없는 걸까. 말수도 적고 반응도 담담하다. 4년 전 아이였다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싶어!"라며 이것저것 다 가리켰을 텐데.




뮤지엄 헤이에 도착해서 전시를 둘러보는데, 딸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어때? 재밌어?"

"그냥 그래."

"이런 거 좋아했는데, 이젠 별로야?"

"음... 좀 지루해."


그 순간 갱년기 증상인지 괜히 서운함이 올라왔다. '내가 이렇게 알아봐서 데려왔는데...'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다가, 아이가 솔직하게 말해준 건 오히려 좋은 신호라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럼 이제 달달한 거 먹으러 갈까?"

"응."


예전에 조잘조잘 말을 잘했는데, 이제는 답이 참 짧다. 어릴 적엔 얌전히 전시를 잘 보던 아이였는데, 이제는 자신의 취향이 생긴 것 같다.


나도 그림 보는 걸 좋아하고, 아이도 그림을 잘 그린다고 미술학원 선생님이 이야기했기 때문에 전시회는 계속 함께 다니고 싶었다. 아이가 좋아할 만한 전시회를 좀 더 신중하게 찾아 상의하며 아이의 취향을 알아가야겠다.


카페 '흑사당'에 들러 주문을 했다.

사랑이는 요거트 스무디와 라즈베리 도넛.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코코넛 휘낭시에.

우리의 취향은 확연히 달랐다.



라즈베리 도넛을 한 입 베어 물더니 눈을 반짝였다.


"맛있어?"

"응. 맛있어."


아기 때부터 딸기와 블루베리를 좋아하던 아이는 여전히 그 취향을 간직하고 있었다. 마음속에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 메뉴 하나를 체크했다. 베리류, 단맛, 부드러운 식감.


나는 코코넛 휘낭시에도 한 입 먹어보라며 권했다.

"배불러."

"알겠어. 엄마도 한 입 먹어봐도 돼?"

"응."


라즈베리 도넛 한 조각을 입에 넣자 입 안으로 단맛과 라즈베리 향이 확 번졌다.


"와. 맛있네."

"엄마도 달달한 거 좋아해?"

"그럼, 엄마도 좋아하지. 요즘은 더 그런 것 같아." "왜?"

"음... 갱년기라서 그런가?"

"갱년기가 뭐야?"


아이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잠시 고민다.


"나이가 들면 마치 사춘기처럼 몸과 마음이 변하는 시기가 있어."

"엄마도 감정기복이 심해져?"

"응. 가끔 이유 없이 짜증이 나기도 하고, 갑자기 슬퍼지기도 해."

"응."


"응", " 아니"로 대답하던 아이의 말이 길어진 걸 보니 괜히 반가웠다. 그리고 우리 모두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으니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딸의 사춘기를, 딸은 나의 갱년기를.


오르골을 만들러 이동하던 중, 밖은 38도에 육박하는 더위였다. 차를 밖에 세워뒀더니 안은 찜통 같았다. 에어컨을 풀로 틀어도 쉽게 식지 않았다.


"와우, 핸들이 뜨거워서 운전을 못하겠어. 괜찮아?"

"응."


딸은 찬바람이 나오는 곳에 얼굴을 기대고 있었다. 말수가 적어서 속마음을 알기 어렵지만, 표정으로는 힘들어 보였다. 이 더운 날씨에 까만색 반팔티에 까만색 통 넓은 청바지, 까만 운동화, 까만 크로스백. 처음 만났던 날 입었던 옷 그대로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더웠다.


"사랑아, 그 바지 덥지 않아? 반바지는 없어?"

"반바지 안 입어."

"그래? 그럼 시원한 긴 바지로 사줄까?"

"괜찮아."


아이의 단호한 어조에서 뭔가 더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혹시 다리에 상처가 있는 걸까, 아니면 살이 쪘다고 생각해서 숨기려는 걸까. 갑자기 여러 가지 걱정이 몰려왔지만, 더 캐묻지는 않기로 했다. 아직 우리 사이엔 나눌 이야기도, 시간도 많으니까.


공방에 도착해 자리를 잡고, 재료를 고르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나와 상의하며 고르는 딸의 모습이 참 예뻤다.


"이거 어때?"

"좋아, 예쁘네. 그거로 할래?"

"응."

"다른 것도 봐봐. 어떻게 만들지 구상하면서 여러 개 골라서 배치한 후에 결정해도 괜찮아."

"응."


짧은 말속에 신중한 모습이 보였다. 꼬마 사랑이도 만드는 걸 좋아해서 이것저것 공방에 데려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렇게 재료를 고르느라 한참을 고민했었다. 그때의 사랑이와 지금의 사랑이가 겹쳐 보였다. 변한 것도 있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글루건을 쓰기 위해 자리를 옮기라고 해서 딸은 맞은편 자리에 앉았고, 나는 딸이 앉았던 자리에 앉으려다 의자에 묻은 습기를 봤다. 너무 더운 날씨에 땀이 배인 것이었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렇게 더운데 왜 긴바지를 입혀서 보냈을까. 아이가 얼마나 더웠을까. 떠 한번 감정이 확 올라왔다. 바지가 땀에 젖어 축축 할 텐데 딸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덥다고 투정을 부릴 수도 있었고, 엄마가 더운데 주차해서 바지가 젖었다고 짜증을 낼 수도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깊은 숨을 몇 번 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직 아이에 대해 알아야 할 게 너무 많았다.


"사랑아, 진짜 괜찮아? 옷이 좀 축축한 것 같은데..."

"괜찮아."


딸의 담담한 대답에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내 마음을 들여다봤다. 나 역시 그렇게 반응하는 사람이었다. 여름이 더운 건 당연하고, 옷이 젖을 정도로 땀이 날 수도 있지 그게 유난을 떨 일은 아니니까.




딸은 이런 내 마음은 전혀 모른 채, 오르골 위에 고른 캐릭터를 열심히 붙이고 있었다. 그 집중하는 눈빛에서 꼬마 사랑이가 보였다.


"엄마, 이거 어디에 붙이지?"

"여긴 어때? 여기도 괜찮을 것 같은데?"

"음... 여기."


변한 것도 있지만 그대로인 것을 발견한 기쁨은 마치 보물찾기 중에 보물을 찾은 듯했다. 집중할 때 나타나는 진지한 표정, 완성하고 나서 보이는 뿌듯한 미소. 모든 게 그대로였다.


"다했어"

"우와, 정말 예쁘게 만들었다. 마음에 들어?"

"응."


태엽을 감은 후 음악에 맞춰 돌아가는 오르골을 우리는 함께 바라봤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차 안에서 딸에게 물었다.


"뭐가 제일 좋았어?"

"오르골."

"왜 좋았어?"

"직접 만들어서."

"도넛은 어땠어?"

"맛있었어."

"오호 그랬어? 다시 오고 싶을 만큼?"

"응."

"엄마도 좋았어. 사랑이랑 함께라서 더 좋았어."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우리 사이의 공백이 아주 조금 메워진 것 같았다. 오늘의 사랑이가 좋아하는 걸 알았고, 다음엔 뭘 하면 좋을지 고민할 기준이 생겨서 좋았다.


함께 산다는 것에 대해 처음으로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그저 한 집에 산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는데, 떨어져 살아보니 '함께 산다'는 건 서로의 시간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무엇을 먹고, 어떤 걸 보고, 무엇을 입는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 모든 순간을 공유하는 것이 함께 사는 것이었다.


때로는 다투기도 하고, 때로는 좋은 감정을 나누기도 하며, 하루의 끝에 힘든 일들을 표정이나 몸짓으로 전할 수 있는 시간. 그리고 서로의 감정 기복을 이해하고 받아주는 시간. 나는 그런 시간을 4년이나 잃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오늘 깨달았다. 비록 갱년기로 감정 조절이 어렵고, 딸도 사춘기로 마음이 복잡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노력 자체가 이미 '함께 사는' 첫걸음이라는 것을.



세상 어느 일도 온전히 나쁜 것만은 없다. 함께 하지 못한 4년이 너무 고통스러웠는데, 그 시간 덕분에 나는 사랑이를 깊이 들여다보고 알아볼 기회를 갖게 됐다. 우리 사이에 다시 스며드는 햇살 같은 시간들을 이제부터 하나씩 모아가면 된다.

간절했던 만큼 감사한 마음으로 소중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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