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남자친구 있어?”
헤이리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앞을 바라보며 조용히 있던 사랑이가 툭 내뱉은 질문이 유리창에 툭 부딪혀 내게로 왔다. 핸들을 잡은 손끝이 잠깐 굳었다. 오십에 코 닿을 나이에 사춘기 딸에게 이런 질문을 받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당황스러웠다. 뭔지 모르지만 살짝 부끄럽기도 했다. 나는 신호를 살피며 애써 웃음 띤 목소리로 대답했다.
“엄마는… 남자 친구 있지.”
나의 시선이 백미러를 타고 아이에게 닿았다.
“나는 모쏠인데.”
사랑이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덤덤하게 말했지만, 내 안에서는 작은 금이 가는 소리가 났다. 회사에서 수없이 들었던 그 말이, 딸 입에서 나오니 질감이 완전히 달랐다. 40살 여자 회원에게 들었을 땐 '큰일 났다. 어떻게 결혼시키지?' 하는 조급한 불안감이었는데, 열다섯 딸에게서 들으니 '큰일 났다. 아직 연애를 하면 안 되는데. 성교육도 해야 하고, 공부에 지장도 있을 텐데.' 하는 걱정이 담긴 불안감에 휩싸였다. 내 눈엔 여전히 한창 자라는 꼬맹이가 스스로를 그렇게 말하니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 예쁜 우리 딸이, 왜 아직도 모쏠일까? 고백하는 친구들이 많았을 것 같은데?"
겉으로는 가볍게 던진 질문이었지만, 진심은 무거웠다. 복잡한 마음이 티 나지 않게 일부러 목소리 톤을 높여 물었다. 그러자 사랑이는 피식 웃으며 눈길을 창밖으로 고정했다.
"학교에서는 욕도 좀 하고 털털해."
상상한 적 없는 욕하는 모습이 떠올라 잠시 멈칫했지만, 웃으며 받아넘겼다.
"엄마랑 있을 때는 안 그러더니, 욕도 할 줄 아는구나. 요즘은 또래문화가 그렇다면서? 너도 잘 어울리고 있구나."
아이는 고개를 돌려, 비어 있는 듯한 눈동자로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 눈빛은 마치 내 속마음을 스캔하는 듯 나를 훑었다.
"우리 딸은 어떤 스타일이 좋아?"
"음... 재미있으면 좋겠어."
"재미있다는 게 행동으로 웃기는 거야? 아니면 대화가 잘 통하는 거야?"
아이가 말하고 싶을 때까지 기다려주려 했는데, 하필 이때 결혼정보회사에서 몸에 밴 습관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회원이 '좋은 사람 소개해 달라'라고 하면 막막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 좋은지 알아내기 위해 질문을 이어가곤 했다. 그 습관이 고스란히 딸과의 대화에 스며든 걸 깨닫는 순간, 살짝 심장이 두근거렸다.
부모들이 두려움에 떨며 그냥 두는 게 최고의 관계 유지 비결이라고 말하는 바로 그 '중2'인 딸에게 질문을 퍼부었다니. 겨우 입을 열었는데 버럭 하지는 않을까. 짜증 내진 않을까. 입을 닫아버리진 않을까. 나는 백미러로 눈동자만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아이의 표정을 살폈다.
"음... 말이 재미있었으면 좋겠어. 아무 말도 안 하면 지겨워."
한참을 생각한 후에 사랑이가 대답을 했다. 후... 참았던 숨이 마음속으로 뱉어지는 느낌이었다. 중2병이 무섭다는 말에 내가 너무 겁을 먹은 건 아닐까. 아이 눈치를 보며 마음을 졸이다간 심장병에 걸리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도 사랑이 앞에서는 티 낼 수 없어, 일하면서 만든 '친절한 예팀장 페르소나'를 꺼냈다.
"엄마도 그래! 말이 핑퐁핑퐁, 주고받아야 말할 맛이 있지. 예/아니오로만 대답하거나 단답형이면... 오~노. 진짜 싫어. 우리 사랑이 좋아하는 스타일도 엄마랑 비슷하네."
역시 '친절한 예팀장'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친절하면서도 살짝 오버스러운 말투로 내 불안을 자연스럽게 감춰주고, 대화를 부드럽게 이어줬다. 그 모습에 '엄마에게는 이런 얘기도 할 수 있구나'라는 안도감을 얻은 건지, 사랑이는 초등학교 때 학원을 같이 다녔던 친구와 썸이라고 소문이 돌았던 이야기부터 "사실 마음에 드는 애가 없어"하는 고백까지 술술 털어놓았다.
'굳이?', '귀찮아', '기억이 안 나'. 사랑이 어록 3종 세트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지저귀는 새처럼 이야기를 쏟아내는 게 너무 신기했다. 이성 얘기는 남녀불문, 나이불문 말문을 열어젖히는 주제였던 걸까.
문득, 사랑이가 내게 "엄마는 남자친구 있어?"라고 물었던 건 정말 엄마의 연애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얘기를 꺼내고 싶어서 던진 미끼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요 똑똑한 녀석, 엄마가 그 미끼를 덥석 물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걸까?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무뚝뚝하고 공감할 줄 모르는 아빠와 지내며, 통제과 지시에 맞춰 살아야 했던 아이가 마음껏 재잘거리던 순간을 그리워했던 건 아닐까?
잠깐의 침묵. 신호가 노란색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녹색으로 바뀌며 차가 움직이자 아이가 물었다.
“엄마 남자친구는 재미있어?”
아이의 상체가 조금 내쪽으로 기울었다. 호기심일까, 확인일까. 나는 숨이 한 박자 늦게 들어가는 걸 느꼈다.
이혼 후, 나는 ‘엄마’와 ‘여자’ 사이에서 브레이크를 밟은 채 오래 서 있었다. 좋아한다는 감정만으론 움직일 수 없는 거리들이 어른의 세계에는 있었다. 사람들과 어울릴 시간조차 아깝게 느껴졌고,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에게 마음이 이끌리게 두지 않았다.
연애와 10년의 결혼생활, 이혼을 겪으며 좋은 시작이 좋은 결말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고,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다시 마음을 여는 건 조심스러웠다.
사춘기와 갱년기의 감정이 닮아있다고 한들, 10년이 넘는 세월이 우려낸 이 감정의 깊이를 열다섯 사랑이가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 이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랑이는 연애의 설렘과 따뜻함만을 간직하길 바란다. 이 감정은 이미 내가 알고 있으니까.
신호에 걸려 브레이크를 밟자 차 안이 살짝 앞으로 기울었다. 백미러 속 아이의 무표정에 여전히 궁금증이 섞여 있었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응. 재미있어. 그리고 좋은 사람이야.”
“그렇구나.”
사랑이는 앞을 바라보며 담백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천천히 창 쪽으로 고개가 기울어졌다. 나는 세이프 가드를 사랑이 키에 맞춰 내리고 속도를 줄였다.
열다섯 딸과 쉰을 앞둔 내가 '남자친구'라는 주제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엄마에게 아빠가 아닌 누군가가 있을 수 있다는 건,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익숙지 않다.
상상을 벗어나 버린 대화는 어색했지만 신선했고, 무엇보다 우리가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다.
사랑이는 사랑이에게 맞는 남자친구를, 나는 나에게 맞는 남자친구를 만나게 되겠지.
결국 우리는 사춘기와 갱년기라는 이름의 시간을 살고 있지만, '남자친구를 만나도 되는 여자'라는 공통점을 가진 존재였다.
엄마와 딸이면서, 동시에 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