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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호 Sep 27. 2024

어차피 못할 거 그냥 해


<21일 차>

 한 4일 만의 요가원이다. 그간 컨디션도 좋지 않았고 햄스트링도 너무 아파 일부러 집에서 쉬었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요가에 익숙해졌는지, 요가를 가지 않으니 괜히 몸이 뻐근하고 찌뿌둥한 느낌이라 집에서 간단한 동작들 위주로 유튜버들의 동작들을 따라 하며 몸을 적절히 풀어주었다. 확실히 할 때와 하지 않을 때의 몸의 움직임이 다르다. 훨씬 가벼워지는 기분이다. 허나 햄스트링이 아플까 봐 겁이 나서 릴렉싱 동작들 외의 격한 동작은 하지 못했다.


 오늘은 빈야사 요가 시간이다. 원장님이 함께 하는 요가는 늘 이야기했듯 사정없이 파워풀하다. 무진장 힘들지만 하고 나면 조금씩 강해지는 게 느껴진다. 햄스트링이 아직까지는 좀 아프긴 해도 푹 쉬어준 덕분인가 전보다는 확실히 많이 풀어진 느낌이다. 아주 살짝 부드러워진 기분.


 여전히 원장님의 요가 시간은 일주일 중 제일 힘들다. 다른 회원님들도 역시 힘이 드는지 여기저기서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는 소리가 간간이 들리곤 한다. 어느 지점부터는 거친 숨소리들로 들썩거린다. 그럴 때면 개인적인 친분은 없어도 나도 모르게 ‘힘내세요! 같이 버텨요! 왜냐면 나도 지금 죽을 맛이거든요…’ 하는 내적 소리가 튀어나온다. 아닌 게 아니라, 주위 회원님들의 몸이 유난히 떨리거나 버티기 어려워하는 모습이 보이는 날은 나도 조금씩 마음이 동요되어 집중이 흐트러지곤 하기 때문이다. 요가는 이럴 때 보면 몸과 마음이 별개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행위 같기도 하다.


 늘 입에서 약간 피맛이 날 정도로 힘든 빈야사 시간이었지만 오늘은 그래도 한 결 낫다. ‘어라? 벌써 끝난다고?’ 싶을 정도로 오늘은 많이 힘들지 않았다.


  알게 모르게 나의 몸이 좀 더 강해진 것 같아 집으로 가는 길이 뿌듯했다.



<22일 차>

 ‘훗. 어제의 강함을 느낀 나. 오늘도 강하겠지. 오늘도 아마 잘할 거야. 매일의 요가 일기를 쓰고, 20일이 넘는 시간을 해왔으니 그래. 난 좀 강해졌을지도.’라고 생각했으나 오산이었다.


 아쉬탕가 시간이다. 처음 몸을 풀 때부터 뭔가 느꼈다. 고작 편히 앉아 왼쪽 오른쪽 번갈아가며 스트레칭을 하는 동작인데 지지하는 팔이 조금씩 떨려온다는 것을.

 ‘흠. 기분 탓인가.’

 아니. 기분 탓이 아니었다. 오늘 분명 나의 컨디션은 좋은 편이었고 요가를 하고픈 의욕도 충만했는데, 플로우를 할 때마다 온몸에 힘이 좌악 빠지는 게 느껴진다. 결국은 차투랑가 단다아사나를 할 때 팔에 힘이 풀리며 가슴팍이 털썩 내려앉아버렸다. 정말이지… 종이 쪼가리 마냥 한없이 약하게, 한없이 스르륵 내려앉아 스스로도 어이없는 웃음이 났다.

 ‘그렇지 아직 이게 나지.’

 뭘 바라고 왔나 보다. 그래서 좀 비장하게 시작했는데 어김없이 작게 작게 실망한다.

 ‘이런 날도 있는 거지!’

 그래. 이제 겨우 요가 나부랭이인걸!


 이즈음 등장하는 마법 같은 주문세트. ‘나는 햇병아리인걸!’, 내지는 ‘나는 아직 요가 나부랭이인걸!’ 같은 말들. 스스로 위로도 되지만 어찌 보면 합리화 같기도 하다. 뭐. 아무렴 어떠냐. 계속 나아갈 용기가 생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말들이다. 아무렴!


 그런데 요가 100일 차에도 ‘난 아직 햇병아리인걸!’ 하고 말할까 봐 살짝 걱정은 된다. 이 요가라는 게 어디까지가 햇병아리이고, 어디부터가 닭인지 잘 모르겠지만, 솔직한 마음엔 알고 싶지는 않다. 더 솔직해지자면 이런 것에 연연하고 싶지 않다. 만약 1년을 했는데도 아직 이 수준이라면 스스로가 아닌 척해도 내심 주눅 들 것 같다. 그렇다. 나는 강한 성취형 인간인가 보다. 무언가 시작하면 정체되는걸 스스로 용납하지 못하는, 어떻게든 성장할 거리를 찾거나 생산적인 결과물을 얻어 무엇이라도 남겨 보이려는...! 이게 나의 원래 성격이라면 훗날 노력해도 성장하지 않거나 납득할만한 결과물이 없을 때엔 꽤나 주눅이 들 것 같다. 나는 나의 이런 성향이 썩 맘에 들지 않는다. 인생에 여유가 없단 얘기이니까.


 그러나 이젠 마음가짐이 조금씩 달라짐을 느낀다. 살아온 환경의 변화 때문일지, 나이 들어감의 작은 미학일지는 몰라도 요가를 할 때만큼은 ‘그냥’ 하고 싶다. 어디가 끝이고, 어디까지 도달해야 하고 그런 것 생각 않고 오로지 내 몸을 위해 그냥 열심히 꾸준하게 해보고 싶다. 하지만 희망사항과 인간의 관성은 서로 가 닿기 힘든 나이가 되었으므로 종종 이런 말들을 반복하고 또 번복하는 글을 쓰겠지.


  그럴 때마다 요가의 본질과 내가 가닿고 싶은 곳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잘 달래줘야겠다. 끊임없이 호흡을 하려면 내 안의 나와 잘 통하는 게 먼저다. 어떤 목표라던지 욕심 같은 것들 보다 먼저 나를 알아차리러 가는 나만의 진짜 요가를 하도록 노력해 봐야겠다.



<23일 차>

 아침부터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살짝 귀찮은 날씨지만 주말 내내 먹은 음식들과 둔해져 있는 몸을 보니 움직여야겠다. 용기 내어 가뿐하게 엉덩이를 떼고 종종걸음으로 요가원으로 향했다.


 아쉬탕가 초급 시간. 일주일 중 가장 집중하여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자 잘못된 동작이나 습관들을 바로잡을 수 있는 고마운 시간이다. 아무래도 초급반이라 기본적인 자세나 동작을 바로잡아 몸에 익도록 알려주고, 자신의 몸상태를 점검하는 데에 집중하도록 도와주어 천천히 여유 있게 수업이 진행된다. 그리고 또한 겸손하게 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오호. 나 이 자세 이제 좀 되는데?’ 싶은 마음에 나름 자신 있게 동작에 들어가서 버티고 있으면 어느샌가 사뿐히 다가와 가벼운 터치로 나의 뒤로 말린 골반을 슬쩍 밀어 넣어 주거나 기울어진 몸을 가볍게 바로잡아 주고 사라지시는 선생님… 선생님의 터치가 이루어지고 나면, 신기하게도! 쉬웠던 동작이 어려워지는 마법에 걸린다. 좀 더 힘이 들어가고 좀 더 동작이 어려워진다.


 그러니까 내가 힘들지 않았고 아프지 않았던 건 조금 잘못된 동작을 하고 있었던 것. 살짝의 디테일이 달라졌을 뿐인데 요가가 몇 걸음 더 멀어졌다.

 ‘역시 쉬운 게 없군.’

 어쩔 수 없지. 또 처음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하면 되는 거다.


 머리가 나빠서 그리고 의외로 또 단순해서 눈에 보이는 동작들만 따라 하기 급급한 나는 아직도 용어들이 낯설고 플로우의 순서도 헷갈린다. 외워볼까 했지만 외우는 데에 신경 쓰느라 동작을 제대로 못하는 건 또 싫어서 일단 계속 반복하여 몸에 익도록 하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 아, 목표라기 보단. 그냥 그런 날이 오리라 믿으며 늘 같은 마음으로 처연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다. 어려운 용어는 수업 중에 머릿속에 박히는 단어가 있으면 집으로 돌아와 그날마다의 궁금증을 해결하고 머릿속에 담아두는 걸로 익혀가면 될 것 같다.


 오늘 오래간만에 머릿속에 박힌 단어는 ‘반다’이다. 선생님께서 한 번씩 “반다에 좀 더 집중하세요!”라고 이야기하시는데, 반다가 무엇일까? 알 듯 말 듯한 용어이지만 궁금하여 집으로 돌아와 검색에 들어갔다.


 반다라는 것은 '묶는다, 잠근다'와 같은 뜻으로 쓰인단다. 체내의 프라나 순환을 저장하기 위한 근육 수축이라고… 여기서 ‘프라나’라는 것은 '에너지' 혹은 '기'와 같은 의미란다. 반다는 이런 프라나를 저장하여 영적인 에너지로 순환시켜 준다고 한다……. 음… 어렵다. 어려워. 뭔가 조이고 수축하며 행하는 동작 같긴 한데, 프라나라는 것을 저장하고 영적인 에너지로 순환하고 등의 이야기는 내겐 너무 고차원적이라 어렵기만 하다. 일단 나는 요가 햇병아리니까! 반다라는 말이 나오면 뭐든 잘 조여(?) 봐야겠다. 하다 보면 되겠지. 하다 보면 알겠지.


 아! 그리고 오늘 차투랑가 단다아사나에 관해 디테일한 동작을 배웠다! 내게 매우 필요한 설명이라서 좋았다. 여태 나는 차투랑가 단다아사나 전에 플랭크 동작에서 머무를 때에 발을 어느 만큼 뒤로 뻗어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발을 뒤로 더 뻗었다가 앞으로 끌어왔다가 이랬다가 저랬다가 마냥 허우적댔었는데, 오늘은 선생님께서 어느 정도 발을 뻗어야 하는지 그리고 뒤꿈치를 어느 정도로 빼야 하는지, 팔의 모양은 어떻게 되는 건지, 상체는 어디까지 내려와야 하는 건지에 관해 친절히 알려 주셨다. 아주 유익한 시간이었다. 배운 내용을 토대로 오늘은 집에 가서 연습을 좀 해봐야겠다.


 오늘도 하나 했다!



<24일 차>

 오늘은 일주일 중 제일 힘든 빈야사 요가 시간이다. 원장님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빠이팅 넘치게 몸을 움직이는 시간!


 아침부터 살짝 걱정이 되었다. 이유는, 어제 밤새도록 설사를 했기 때문이다. 하… 정말 모든 것이 빠져나가는 경험을 했다. 그래서 몸에 기력이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배탈 증세는 점차 멎어졌고 오히려 운동을 해서 몸을 따뜻하게 덥혀주는 게 더 도움이 될 것 같아 주저 없이 요가원으로 향했다.


 수업 시작 5분 전에 도착을 했는데 이미 많은 분들이 와 계셨다. 역시 힘들지만 제일 운동이 되는 시간이라 그런가 평소 같은 시간대보다 더 많은 회원님들이 먼저 와서 자릴 잡고 있다. 그런 의미인 즉, 내 자리는 원장님 바로 근처가 될 거란 의미이다. 원장님 곁의 자리는 제일 마지막에 채워지곤 하는데 아마도 다들 무언가 부담스러운 위치이기 때문이겠지? 나도 그랬다. 못하는 몸뚱이를 앞에서 자랑하려니 부끄럽기도 하고 괜히 더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은 기분도 들고. 허나 난 이젠 더 이상 이 자리가 부담스럽지 않다! 왜냐면, 못하는 게 당연한 거니까.


 ‘어차피 못 할 거 그냥 해.’


 이건 내가 요즘 무언가를 도전하기에 앞서 주저하는 마음이 들 때 혼자 되뇌는 주문 같은 거다. 작년 여름에 즐겨보던 드라마 속의 대사이기도 한데, 스치듯 지나간 대사이지만 내가 듣고 싶은 말이었는지 마음에 딱 박혀버렸다. 그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은 작가가 되기 위해 사람들 앞에 내놓을 글을 쓰려하는데, 처음이라 자신도 없고 못할까 봐 주저하던 와중에 이러한 주문과 같은 말을 되뇌고는 용기를 내어 글을 쓰기 시작한다. 나 역시 이렇게 브런치라는 플랫폼을 통해 글을 쓰는 것도 처음이고, 요가도 이렇게까지 오래 다니며 기록하는 건 처음이므로 여러모로 내게도 도움이 되는 주문이기도 하다. (혹시 이 글을 보시는 분들 중에서도 좋아하는 일이 있지만 사람들 앞에서 시도하려니 겁이 나 주저하는 것들이 있다면, 이 주문을 한번 외워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은근 도움이 많이 되더라고요!)


 역시나 시작 10분여를 지나니 점점 빡세 지기 시작한다. 그래도 이번시간엔 나 제법 힘이 있다. 어제 비록 설사로 모든 걸 내보냈음에도 여태 20여 일간 운동했던 게 헛수고는 아니었는지 근육들이 이젠 꽤나 처음보다 잘 버텨준다. 조금 든든해진 느낌. 스스로가 든든해진다는 게 이런 기분인 건가.


 나는 늘 몸이 약하고, 체력적으로 많이 후달리는 사람이라 신체활동에 자신이 없는 편이었는데 처음으로 스스로의 몸이 듬직하게 느껴졌다. 역시 몸은 솔직하다. 내가 하는 만큼 무언가 성과가 없을 때, 노력 대비 성과가 미미할 때, 그래서 마냥 주눅이 들 때 운동을 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 같다. 낮아진 자존감을 약간은 일으켜 세워 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 가장 즉각적인 성취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25일 차>

 아쉬탕가 시간이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정말이지 아침부터 ‘아- 가기 싫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앉아 화장실에서 아침 볼일을 보다 문득 지난 일들이 떠올랐다. 구질구질하고 오래된 해답 없는 관계에 관한 이야기들…(왜 이런 것들은 꼭 욕실에 들어가면 하나둘씩 불쑥불쑥 올라오는지 의문이다. 이쯤이면 욕실은 그 안의 물방울들 따라 지난 시간들이 머무르며 둥둥 떠다니는 공간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예전 같으면 오래 궁리하고 어떤 게 최선일까, 나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나 따위를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을 테지만, 이젠 그런 에너지나 시간 따윈 없다. 왜냐면 나는 요가를 가야 하기 때문이다.


 ‘가자. 가는 게 좋다.’


 백 번 생각해도 답도 없는 고민들을 해 봤자 궁둥이 떼고 움직여 지금 내 몸에 충실하는 게 낫다. 생각으로 얻은 게 아니라 직접 경험하여 얻은 나름의 이치다. 물론 그런 궁리와 성찰, 자신을 바로 보는 그런 시간들이 헛된 건 아니다.  그 안에서 얻고 깨달은 것들이 무수히 많다. 다만, 타인의 마음이나 행동에 관해 내 멋대로 의미를 부여하거나 해석하여 완전 다른 각도로 나아가버리는 바보 같은 짓은 경계해야 한다는 주의이다. 어렵지만. 그런 관계는 그냥 그대로 두고 바라보는 게 답일 때도 있으니까.


 그냥 두고 바라본다는 것은 시간이 흐를 공간을 둔 다는 것이고 나는 이 또한 어떤 명상이나 성찰과도 맞먹는 행위라 생각된다. 기다림이란 것은 수없이 많은 자신의 마음을 누르고, 이해하고, 흘려보내는 수련과도 같은 행위 같다. 잘 기다리려면 지금 이 시간에 당장 충실해야 하는 수밖에. 그러나 말이 쉽지 ‘지금 이 시간에 당장 충실하기’가 와닿지는 않는다.


 그럴 때 내게는 이제 지금 내 행위에 오롯이 집중하게 만드는 기똥찬 방법이 하나 있으니 그건 바로 요가이다. 정확히는 요가원에 가서 요가하기.


 집에서 혼자 하는 요가는 나 같은 의지박약은 요가원에서 하는 것만큼 충실하지 못하다. 조금이라도 무리가 가거나 힘든 동작이 나오면 '아이쿠야. 힘들어 죽겠다. 하악 하악.' 하며 금세 몸을 굴려 요가 매트 위에 널브러져 누워있을게 뻔하니까. 어떤 임계점을 터치하고 못하든 잘하든 끝까지 물고 늘어져 자신의 페이스로 묵직하게 밀고 가는 데엔 요가원에서 하는 요가가 딱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어떤 생각도 들지 않을 만큼 불태운 채 후들거리며 집으로 돌아와 오늘은 어떤 글을 쓸까… 하고 생각하면, 그 외의 답도 없고 영양가 없는 생각이 밀고 들어 올 틈이 없다. 오늘도 미친 듯이 불태우고 집으로 돌아와 글감을 생각하고 후달거리는 다리를 겨우 이끌어내어 꼼꼼히 씻고 머리를 말리고 허기진 배를 급히 달래기 위해 닭가슴살과 빵을 데워 입속으로 넣어주고 주섬 주섬 짐은 챙겨 글을 쓰기 위해 카페로 왔다. 요가를 가기 위해 밖으로 나서고, 지금 카페 의자에 앉을 때까지, 잡생각이 밀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나로서는 아주 괜찮은 루틴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오늘 아주 잠시 동안 요가시간에 잡생각이 들었다. 우리 요가 타임엔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계신다. 아니다. 60대이실까? 나이를 종잡을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가는 시간마다는 항상 계시는 부지런한 아주머니 한 분이 계신다. 언제부터 요가를 시작하셨을까? 잘은 몰라도 오래되어서 몸에 익은 행위는 아닌 것 같다. 오늘 문득 그분이 눈에 들어왔다. 나이가 있으신지라 젊은 사람들에 비해 근력도 딸리고 유연성도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하나하나 자신의 페이스대로 이어 나가는 모습에서 나도 모르게 응원의 마음이 솟아올랐다. 그리고는 이내 엄마가 생각났다. '우리 엄마도 동네 요가원에 간다면 혼자 제일 힘들어하고 혼자 제일 나이가 많을 테지.' 그리고는 이내 급 슬퍼졌다. 왜 이런 상황에 엄마만 빗대면 슬퍼지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아니. 다들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건데 왜 멋대로 감정을 붙이고 난리야. 오버하고 있다.’

 나 혼자 멋대로 '멋있는 일이다' 내지는 '속상하고 슬픈 일이다' 따위를 갖다 붙이고 있더라. 나이 듦 자체를 나는 너무 서글픈 일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저 저 또래의 어머님들은 내가 하고 싶어 하는 행위일 뿐 인걸! 나이가 들어 몸이 굳고 근력이 딸리고 유연성이 없어지는 건 당연한 일인데, 당연한 일 가지고 뭘 그렇게 감정을 갖다 붙이고 있는지 모르겠다. 좀 더 비틀어 생각하면 나 되게 오만한 사람 같기도.


 그냥 우리는 다 똑같이 '요가를 하러 온 사람들' 일 뿐이다.


 내 요가나 잘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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