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안에서, 찰나의 로맨스

by 휴지기

스무 살에서 스물한 살로 넘어가는 겨울이었다. 대학 입학 관련한 무슨 일인가로 서울에 왔다가 집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용산역에서 무궁화호 기차를 타면서 혹시 옆자리에 멋있는 남자가 앉아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었다. 그런 기대들은 번번이 헛되게 끝나게 마련이지만 나는 그때 스무 살, 혹은 스물한 살이었다. 기대가 그냥 기대만으로 날아가 버린다는 걸, 그래서 대부분의 기대는 씁쓸함을 남긴다는 걸 아직 모르고 있던 나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진짜로 옆자리에 멋있는 남자가 앉았다. 통로 쪽에 먼저 앉아있는 나에게 미안해하며 내 무릎과 앞 좌석 사이로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가 앉은 남자는, 커다란 백팩을 메고 볼캡 모자를 쓰고 있었다.

남자는 자리에 앉자마자 가방에서 가죽 수첩을 꺼내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창밖을 보는 척하며 언뜻언뜻 고개를 돌려 바라본 남자는 내 이상형에 가까웠다. 심지어 기차 안에서 수첩에 뭔가를 계속 끄적이는 섬세함이라니! 이건 어쩌면 운명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뭔가를 해야 했다. 심장만 콩닥거리며 가만히 앉아있다가 운명의 상대일 수도 있는 남자를 떠나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 마음을 전해야 하나 계속 고민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옆자리의 남자는 수첩에 뭔가를 쓰는 데에만 열중할 뿐 나에게는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혼자서 얼굴이 빨개지면서 무엇을 해야 후회가 없을까 머리를 굴렸다. 그때, 기차 통로 문이 열리며 간식 카트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거다 싶었다. 나는 승무원을 불러 바나나 우유 두 개를 샀다.


우유를 사기는 했는데 이걸 또 뭐라고 하면서 전달해줘야 하나 고민이었다. 옆자리 남자는 내가 뭘 샀는지 따위에는 관심 없이 계속 수첩에 뭘 적고 있었다. 어느 타이밍에 말을 걸고 무슨 말을 하면서 우유를 줘야 하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그냥, 저기요, 이러면서 우유를 하나 내밀었다. 그 남자는 갑자기 자기 눈앞에 들려있는 바나나 우유를 보고 의아해하더니 웃으면서 우유를 받아줬다. 그 남자는 충북대학교 공대에 재학 중이라고 말했고, 말하는 도중에 천안역인가에 곧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자기는 여기서 내려야 한다며 수첩에 연락처와 주소를 급하게 적어 찢어주고 기차에서 내렸다. 나는 연락처와 주소가 적힌 글씨를 보며, 이렇게 내 로맨스는 성공한 것인가, 하고 얼떨떨해하고 있었다.


잠시 뒤에 밖에서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남자가 모자를 벗어 얼굴을 온전히 보여주었는데, 그 모습에 나는 깜짝 놀랐다. 얼굴을 보고 실망했던 건 아니었다. 얼굴은 내가 상상하던 것과 비슷하게 멋있었다. 그런데, 그는 해병대였다. 유리창 너머에 있는 남자는 손으로 전화기 모양을 만들며 꼭 연락하라고 했다. 나는 그러마고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는 와중에 기차는 출발했다.


내가 그 남자에게 연락을 했을까?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그때는 이상하게 군인인 게 싫었고, 또 이상하게 해병대인 건 더 싫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남자에게는 해병대에 지원해야 할 나름의 진지한 고민과 생각이 있었을 것이고, 휴가 나와 기차 안에서도 계속 뭔가를 써야 할 절박함이나 소망 같은 것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때 내가 그 남자에게 연락을 했다면, 그 남자가 영하의 기온에 입김을 내뿜으며 극한의 훈련을 받을 때, 혹은 차가운 바다 안에 들어가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연습을 할 때 조금의 위로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나도, 혼자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들어가 잘나고 똑똑하고 세련된 아이들 틈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소외감 같은 것을 조금은 위로받았을지도.


그때 그 남자는 스물둘이나 스물셋쯤이었었던 것 같다. 그 어렸던, 내 이상형이었던, 지금은 마흔이 훌쩍 넘어있을 그 남자에게 더는 해병대 훈련 같은, 자기 몸을 의지로 이겨야 하는, 극기 훈련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본다. 혹여나 일어나더라도 옆에서 따뜻한 마음을 전해주는 이가 있어 세상에 홀로 떨어져 세상 모두와 싸우고 있다는 황량한 느낌이 들지 않기를. 이것이 잠시나마 기차 안에서 설렘과 낭만을 전해준, 그에게 내가 해주는, 어쩌면 닿지 못하는 위로이고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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