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후반부터 결혼이 하고 싶었다. 결혼만 하면 내가 해야 할 대부분의 과업들을 클리어하는 것 같았다. 결혼 이후의 삶은 한 번도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았다. 막연하게, 뭉뚱그려서 안정적이고 편안한 시간들이 저절로 흘러가게 될 줄 알았다.
서른두 살 12월 말에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하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남쪽 지방에 신혼집을 차렸다. 아무 문제없었다. 나는 수도권에서의 삶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고, 내 능력의 한계를 주변 사람들이 나보다 더 많이 알아챈 것 같아 그곳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 남쪽 지방에서의 삶은, 어쩌면 나에게 도피처였을지도 모른다.
신혼은 달콤 쌉싸름했다. 남편과 함께 있는 시간에는 소리 내어 웃는 순간이 많았지만 남편은 자주 나를 혼자 있게 했다. 회사일이 바빠서라고 했다. 그 말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다만, 아무도 모르는 곳에 나를 던져놓고 방치하는 남편이 원망스러웠을 뿐이다.
연세가 많으신 시아버지는 ‘공자가 시급하다’는 문장으로 끝내는 손 편지를 남편에게 쓰셨다. 우리는 손자가 보고 싶다는 표현을 참 현학적으로 하신다며 함께 웃었을 뿐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생기면 낳겠지만 가능하면 생기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도 한편엔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나 하나 챙기기도 버거운 사람이었다.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건, 말할 수 없는 책임감과 의무감이 뒤따르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생명 하나를 온전히 책임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결혼 후 반년만에 대학교 친구들과 여행을 갔을 때 아이를 갖고 싶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오랜 시간 이야기했었다.
여행을 갔다 온 후 이상한 느낌이 들어 임신테스트기를 사용해 봤다. 두줄이었다. 남편에게 전화를 해서 울었다.
“어떡해, 임신인가 봐. 큰일 났어. 책임져.”
무서웠다. 결혼은 하고 싶었지만 아이와 함께하는 결혼 생활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다. 그래서 먼저 결혼한 선배 워킹맘이 시댁도 친정도 없는 그 먼 곳으로 가서 애는 어떻게 키울 거냐고 걱정을 했을 때에도, 어떻게 되겠죠 뭐, 하고 넘겨버렸다. 심지어 나는 아이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다른 많은 여자들처럼 귀여움에 열광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임신한 걸 알았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남편에게 말한 것처럼 ‘큰일 났다’였다.
병원에서 임신 3주라고 했다. 친구들 앞에서 아이를 갖고 싶지 않다고 말할 때, 이미 아이는 내 뱃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에게 미안했다. 하지만 또, 수정된 직후니까 듣지는 못했을 테지, 하면서 넘어갔다.
임신했다고 하니 직장에서 힘든 업무는 빼주었다. 초기 몇 달이 중요하다면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푹 쉬라고 다들 배려해 주었다. 유일하게 임신한 나를 배려해주지 않은 건 우리 남편뿐이었다. 남편은 임신을 반기면서도, 임신한 아내의 남편으로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고, 그것을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남편에게 중요한 것 생존이었다.
남편은 생존을 위해, 그러니까 먹고사는 것만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는 사람 같았다. 문제는, 그 모든 것에 나와 배속에 있는 우리 아이도 포함된다는 것이었다. 임신 초 입덧이나 큰 힘든 증상이 없었던 나는 임신하기 전처럼 직장 다니고 집안일을 하고 남편을 기다렸고, 남편도 내가 마치 임신하지 않은 것처럼 회사에 아침 일찍 나가 새벽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언제나 술을 마신 채로.
내가 임신하고 싶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남편과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편을 사랑했지만(그때는) 남편이 나에게 하는 말의 많은 부분이 진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남편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일에 매달려도, 큰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아이가 나에게 왔다. 아이를 잘 키울 자신이 있었냐고? 아니,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키워내기는 할 것 같았다. 어찌어찌하다 아이가 내게 온 것처럼 또 어찌어찌하다 보면 아이가 자라나겠지 생각했던 것 같다.
그때 우리에게 온 아이가 지금은 초등학교 3학년이다. 아이가 어제 마무리하지 못한 숙제가 있다고 오늘 일찍 깨워달라고 했다. 아이가 잠에 취해 잘 일어나지 못하길래 머리를 쓰다듬고 팔다리를 보듬으며 말했다.
“귀여우면 다야?”
아이는 배시시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