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속의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아이를 가졌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태명을 물어왔다. 아이도 어쩌다 생긴 거라서 태명 같은 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태명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한 날, 그날도 남편은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왔다. 낡고 좁은 집 거실에 둘이 나란히 누워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 콩알만 한 아이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 생각했다.
“딸이면 말숙이, 아들이면 말봉이라고 하지 뭐.”
남편은 농담처럼 두 개의 이름을 내뱉었다. 술기운에, 고민하기도 귀찮고, 웃기는 이름이라고 생각해서 던져본 말인 것 같았다. 나는 이상하게 그 이름들이 나쁘지 않았다. 너무 촌스럽지만, 아기에게 촌스러운 태명을 지어주면 건강하게 잘 자란다는 속설 때문이기도 했고, 사랑이나 행복이, 축복이, 이런 예쁜 태명들은 조금 낯간지럽기도 했다. 임신한 지 네 달쯤 되니 병원에서 아들이라고 했다. 그때부터 우리 아이 태명은 말봉이가 되었다.
우리 말봉이는, 배 속에 있을 때도 크게 나를 힘들게 하지 않았다. 임신 초기에는 정말 이게 임신인가 싶을 정도로 별 증상이 없었다. 이런 임신이라면 애 셋도 낳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산부인과 선생님도 항상 웃는 얼굴로 모든 질문에 괜찮다고 해주셔서 마음도 크게 불안하지 않았다. 임신인 줄 모르고 임신 초기에 맥주를 마셨는데 괜찮냐는 질문에도, 피가 살짝 비쳤는데 괜찮냐는 질문에도, 커피를 하루에 한잔쯤 마셔도 되냐는 질문에도 의사 선생님께서는 다 괜찮다고, 상관없다고 하셨다.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는 임신 오 개월쯤부터 점점 소화가 안 되기 시작했다. 뭔가를 먹으면 속이 울렁이는 것 같았고 트림이 자꾸만 나왔다. 증상은 심했다가 괜찮아졌다가를 반복했고, 심한 날은 일부러 목에 손을 넣어 구토를 했다. 그러면 속이 좀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속이 울렁거리니 자꾸 차가운 걸 찾게 되었다. 어느 날 저녁에는 배스킨라빈스에서 민트초코칩만 파인트로 사서 잔뜩 퍼먹었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순간에는 울렁거림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한두 시간쯤 뒤에 속이 다시 울렁거렸고 구토를 하고 싶었다. 헛구역질만 계속 나와 또 목구멍에 손을 넣어 억지로 구토를 했다. 변기 물이 민트색으로 변했다. 남편에게 쨍한 민트색으로 변한 변기 물을 보여주며 말했다.
“오빠, 이거 봐. 내가 이렇게 힘들다구. 오빠 알아?”
남편은 그래 알아, 고생하네, 라고 했지만 행동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임신한 내 앞에서도 끊임없이 술을 마셨고 남편의 도움이 필요할 때에는 항상 옆에 없었다. 산부인과도 처음 한 번, 초음파 찍을 때 한 번을 제외하고는 다 혼자 갔었던 것 같다. 나는 이런 남편에 대한 서운함과 원망을 가감 없이 표현했다. 남편은 그때마다 미안하다고 말했다. 어느 날은
“애기가 애기를 낳느라 고생하네.”
라고 했다. 나는 서른셋, 애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남편은 저 말은, 꽁꽁 얼어 있었던 내 마음에 살랑, 훈풍을 불어다 주었다. 남편은 저런 사람이다. 오래 속상하게 해놓고 잠깐 달래주는 사람. 말 한마디 예쁘게 하고 천 냥 빚을 지게 하는 사람.
직장을 다녀야 해서 태교는 따로 하지 못했다. 누군가가 선물해 준 모차르트 태교 음악을 억지로 들어보려고 했는데 너무 잔잔해 김광석이나 이적, 장기하로 바꾸어 들었다. 음악을 들으면서 우리 아이가 뛰어난 감수성과 지성을 가지고 태어나 이적이나 장기하처럼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먹고 사는 생존과 관련없는 일을 하며, 다른 사람들에 용기와 위안을 주며, 무엇보다도 평생 저작권을 받으며.
육 개월이 지나니 태동이 강하게 느껴졌다. 발로 배를 차는지 자주 오른쪽 배가 꿀렁꿀렁했다. 주변 많은 사람들이 불룩 나온 내 배를 만지면서 신기해했다. 나는 신기해하고 반가워하는 그들이 고마웠다. 그들은 내 배를 만지면서 ‘말봉아~’라고 부르기도 했고 태동이 느껴진다며 크게 웃기도 했다. 나는 그들의 반가운 마음이 배 속에 있는 말봉이에게 그대로 전해졌으리라 생각한다. 그들의 손길과 웃음이 태교가 되어 지금 청량하게 잘 웃는 아이로 자라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 믿는다.
배는 점점 불러왔는데 살은 찌지 않았다. 만삭 때 몸무게가 59킬로그램이었다. 원래 몸무게에 딱 아이 무게와 양수 무게만 더해진 것 같았다. 자주 서 있어야 하는 직업이라 살 찔 틈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소화가 잘 되지 않아 먹을 것을 많이 먹지 못해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예정일 열흘 전에 출산 휴가에 들어갔다. 맘카페 같은 데 보면 출산 가방을 싸놔야 한다고 하는데 그 가방에 뭘 넣어야 할지 몰라 신생아용 기저귀랑 젖병만 넣어두고 있던 상태였다. 평일인데 출근하지 않아 기쁜 마음에 시내에 나가 친구도 만나고 집 안 청소도 좀 했다.
출산 휴가 삼 일째였다. 자려고 누웠는데 진통이 시작되는 것 같았다. 의사 선생님이 15분에서 20분에 한 번씩 통증이 오면 병원에 바로 오라고 했는데 딱 20분에 한 번씩 진통이 왔다. 하지만 가진통일 수 있었다.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이건 진짜다. 1시간 넘게 진통이 규칙적으로 오고 있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였다. 남편을 깨웠다.
“오빠, 나 애가 나올 것 같애”
옆에서 자고 있던 남편은 ‘벌써?’라면서 벌떡 일어났다. 당황한 우리는 출산 가방도 챙기지 않고 병원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도 규칙적인 통증이 이어졌다. 두려움과 반가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애가 크다고 했는데, 생살을 찢는 산통을 내가 잘 버틸 수 있을지 두려웠고, 드디어 우리 아기, 말봉이를 만날 수 있다는 게 반가웠다. 새벽이라 도로에 차가 없었다. 우리는 규정속도 80인 도로를 120으로 달려 산부인과에 도착했다.
새벽에 아이가 안방으로 넘어왔다. 시계를 보니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엄마 보고 싶어서 왔어.”
아이는 침대로 올라와 품에 폭 안겼다. 포근하고 따뜻하다. 아이의 연한 볼과 볼록한 이마, 낮은 코에 뽀뽀를 한다. 우리 순둥이, 배 속에서나 세상 속에서나 언제나 나를 살게 하는, 나의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