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볕더위가 물러나고 제법 찬 바람이 불 때쯤 나는 제주에서 할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사진 속 할머니는 내가 기억하는 모습보다 주름이 적었고, 머리숱이 풍성했다. 낯이 익은 해녀 할머니들과 친척 어른들은 모두 맞춘 듯이 까만 옷을 입고 있었다. 몇몇 어른들은 할머니 사진 앞에 털썩 주저앉아 아이처럼 목 놓아 울었다.
“오리발 한 짝이 먼바다에서 발견됐다게. 오리발에 한자로 ‘해숙(海淑)’이 쓰여 있다니 우리 대장 것이 아닐 수가 없다게.”
“계절 바뀌어 물 차가운데 우리 대장 추워서 어찌할꼬, 어찌해.”
복도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조각조각 주워 들었는데, 그래서 결국 우리 강해숙 할머니는 언제 어떻게 됐고, 지금은 어디에 있다는 말인지 좀처럼 알 수가 없었다.
바다 비린내, 정수리를 파먹듯 따갑게 내리쬐는 제주의 태양, 살갗에서 모래처럼 서걱거리던 소금기, 할머니의 푸른 전복죽, 내 이마를 짚던 할머니의 메마른 손바닥…….
할머니는 컬러로, 할아버지는 흑백으로 존재하는 10년 전 제주, 눈부시면서도 가슴 시린 그해 여름은 어찌 된 일인지 해가 지날수록 선명해졌다.
한라산과 탁배기를 품고 살던 할아버지는 주변 사람들의 우려와는 달리 큰 병 없이 명을 이어가시다가 노환으로 재작년부터 서울에 있는 요양원에서 지내신다. 딸들이 모두 서울에서 살고 있어서 세 자매가 돌아가면서 주기적으로 할아버지를 만나러 간다.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매미 울음이 간간이 들려오던 6월 어느 주말, 나는 수박 한 통을 사 들고 요양원에 가는 엄마를 따라나섰다. 우리가 병실에 들어서자, 할아버지가 엄마와 나를 향해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홑이불 밖으로 고사한 나무껍질처럼 메마르고 튼 할아버지의 팔다리가 드러났다.
침대 옆 창가에는 어버이날에 엄마가 두고 간 카네이션이 검게 말라 죽어 있었다. 엄마는 화분에서 카네이션을 뿌리째 뽑아 흙을 탈탈 털어 쓰레기통에 버리고, 가져온 수박을 병실 한쪽에 있는 공용 냉장고 안에 넣었다. 그 모습을 물기 없는 눈으로 지켜보던 할아버지가 한쪽 팔을 힘겹게 들어 엄마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12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