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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My November 2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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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씨 Nov 24. 2024

흔적

11월 24일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생기지 않았을 나의 흔적들을 더듬어 본다. 네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생기지 않았을 너의 흔적들을 더듬어 본다. 그 흔적들 속에서 우리 사랑의 조각을 찾아 맞추어 본다.


치 퍼즐처럼.








딸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함께 퍼즐을 맞추며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퍼즐조각을 입으로 가져가지 않는 시기를 지나 혼자 그림체를 보고 맞춰나가는 딸아이의 모습이 특하기도 신기하기도 했다. 혼자서 앉지도 걷지도 못했던 조그마한 생명체가 루가 다르게 자라나더니 동그랗고 귀여운 등을 보이며 앉아 퍼즐을 맞추고 있는 모습이 꿈결 같기도 동화 속 같기도 했다. 새우깡처럼 통통하고 조그마한 손가락을 움직여 퍼즐을 집고 여기에 놓을지 저기에 놓을지 고민하는 볼록한 이마와 통통한 두 볼, 오리처럼 툭 튀어나온 집중하는 입술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사랑스러운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와 신랑은 이내 가슴이 벅차오른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의 시공간 속에 쿵 하고 떨어진 것 같은 이 사랑스러운 생명체가 움직인다. 나의 눈을 바라보며 웃음 짓고, 울고, 달려와 내 품에 안긴다. 네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생겨나지도 않았을 모든 흔적들조차 사랑이 남긴 잔재 같은 것이었다.


누군가의 집에 갔을 때 유독 온기가 가득한 집이 있다. 나는 그 온기가 그 집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흔적들로 인해 생기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의 가족들이 살아가는 공간을 위해 쓸고 닦으며 그 사람이 존재하지 않으면 생기지 않았을 그들의 흔적들을 사랑의 손길로 정리한다. 모델하우스처럼 손때가 전혀 묻지 않은 가구들, 예쁜 장식품으로 장식된 선반, 사용한 흔적이 없는 부엌과 화장실. 이 공간들이 처음처럼 유지될 수 있는 비결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모델하우스 같은 공간이라도 누군가 살아간다면 그 사람의 흔적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공간을 따스함으로 채울 것인지 차가움으로 채울 것인지 또한 나의 선택이다.


딸아이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 아이가 그려놓은 그림과 색칠도구들, 잠들기 전 함께 읽었던 그림책. 학교에 가고 난 후 아이의 흔적들을 정리하며 혼자 피식 웃고는 한다. 귀엽기도 하고 비현실적이기도 해서. 나의 세상에, 우리의 세상에, 너라는 존재가 와주어서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지. 하루하루가 너로 인해 얼마나 충만하고 찬란한지. 그렇게 집에 남겨진 아이와 신랑의 흔적들을 나의 손길로 정리한다. 나의 손길이 사랑이 되어 나의 가족에 대한 감사함으로 집의 온기를 채워나간다.








18살 때 아빠의 장례식을 마치고 텅 빈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남겨진 아빠의 흔적들을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피냄새로 진동한 거실에서는 깨진 화분에서 여기저기 튀어나온 흙모래 부스러기들이 발에 밟혔다. 아빠가 늘 풍겼던 알코올향과 피비린내가 섞여 나던 묘한 냄새를 아직도 기억한다. 나에게 주려고 사두었던 식탁 위의 시리얼 박스, 안방에는 아빠가 입던 옷들이 여기저기 나와있었다. 아빠가 세상에 남겨놓은 마지막 흔적들이었다. 곰곰이 되짚어보면 그때는 보이지 않았던 아빠의 사랑이 그 흔적들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한 사람으로서 잘 살아내고 싶어 고군분투했던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그 또한 사랑이었다.


늘 일하느라 바빴던 엄마가 어쩌다 하루 쉬는 날이면 몰아서 많은 양의 음식들을 만들어두고는 했다. 마치 멀리 떠나가버릴 사람처럼. 엄마의 그런 모습을 보는 게 불안해서 나는 늘 볼멘소리를 했다.


"이렇게 한꺼번에 많이 만들어 두는 건 맛이 없어. 그때그때 해 먹는 게 맛있단 말이야."


엄마가 항상 곁에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한 말이었지만, 현실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마음은 서운했던 어린아이였다. 엄마가 없는 집에서 엄마가 해둔 음식들을 꺼내어 먹으며 세상에 홀로인 듯 외롭고 무섭고 두렵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는 보이지 않았던 엄마의 흔적들이 모두 사랑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그 모든 온기가 담겨있는 음식들이 사랑이었다.  흔적들의 온기가 나에게 사랑으로 남아 나 또한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음을 이제는 안다.




사랑은 마치 곡식단을 거두듯 그대를 자기에게로 거두어들인다.
사랑은 그대를 타락해 알몸으로 만들고,
사랑은 그대를 키질해 껍질을 털어버린다.
또한 사랑은 그대를 갈아 흰 가루로 만들고,
부드러워질 때까지 그대를 반죽한다.
그런 다음 신의 성스런 향연을 위한 신성한 빵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의 성스런 불꽃 위에 그대를 올려놓는다.
사랑은 이 모든 일을 그대에게 행해 그대로 하여금 가슴의 비밀을 깨닫게 하며, 그 깨달음으로 그대는 큰 생명의 가슴의 한 부분이 되리라.

-사랑에 대하여-
<예언자> 칼릴지브란



인생이 마치 퍼즐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어디서부터 맞춰나가야 할지 막막하다가도 한 곳을 정해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은 조각 하나 가 찾아진다. 그렇게 그 조각을 주위로 찾다 보면 어느새 한 부분이 완성되어 있다. 언제 다 맞추나 하고 전체그림을 보면 막연하다가도 하나씩 작은 퍼즐 조각들이 주는 힌트들을 자세히 보다 보면 또 한 부분이 완성된다. 너무 안 찾아질 때는 잠시 손을 놓고 창밖의 풍경을 보기도 하고 다른 곳을 먼저 맞추다 보면 내가 애타게 찾던 퍼즐 한 조각이 내 눈앞에 쓱 나타나기도 한다.


마치 인생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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