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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랑 Jun 23. 2021

여성적 어조를 여성적 어조로 남길 수 없으므로

밥벌이로서의 사교육 이야기 #5


 고2들 문학 수업을 할 때였다. 김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어조를 설명하다가 "이 시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어조를 예전엔 ‘여성적 어조’라고 그랬는데 그건 성차별적 언어니까 아무래도 지양해야겠지"라고 했더니 학생들이 웃는다. 쌤, 그게 왜 성차별적 언어에요. 그럼 너희가 생각하는 성차별은 뭔데? 음, 여성전용주차장?



 이런 한남들, 이라고 쏘아부치고 싶어도 그래선 안 된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먼저 물어야만 한다. "여성만을 위한 전용 공간은 남성에 대한 차별이니까"라는 답을 듣고나면 그제서 "그럼 ‘장애인전용주차장’은 비장애인에 대한 차별일까?"라고 되물을 수 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한 집단에 대한 우대가 곧 다른 집단에 대한 차별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고 그제서야 사회적 소수자로서의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대해 논할 수 있다. 그래야만 논쟁이 시작될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상대방의 주장을 내적으로 무너뜨릴 수 있다.



 물론 지금까지 한 말은 다 헛소리다. 이런 게 통할 리 없다. 어차피 이 대화가 끝나면 모두들 다시 유튜브와 페이스북으로 돌아가 각자의 알고리즘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친절하게 말해야 하는가. 물론 목구멍이 포도청인 까닭으로. 돈을 받는 이상 학생들을 포기할 수 없다. 그들이 변화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한다면 결국 가르친다는 내 존재 이유 역시 사라지는 것 아닌가. 그러니 나는 당신이 변할 거라 긍정해야만 한다. 그것이 밥벌이를 위해 내가 가져야 하는 최소한의 윤리다.






 변화는 더디다. 더딘 정도가 아니라 자주 퇴행한다. 올해 고3 수업을 위해 <EBS 수능특강> 문학책을 펴는 순간 나는 기겁을 하고 말았는데, 이를테면 책에는 이런 시가 있는 것이다.



 “일곱 달 아기 엄마 구자명 씨는/ 출근 버스에 오르기가 무섭게/ 아침 햇살 속에서 졸기 시작한다/ (...) 고단한 하루의 시작과 끝에서/ 잠 속에 흔들리는 팬지꽃 아픔/ (...) 그러나 부엌문이 여닫기는 지붕마다/ 여자가 받쳐든 한 식구의 안식이/ 아무도 모르게/ 죽음의 잠을 향하여/ 거부의 화살을 당기고 있다” 오정희, <우리 동네 구자명 씨> 중



 여성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가족의 평화에 대한 비판적 인식, 페미니즘 문학의 의의, 따위를 얘기할 순간을 상상하며 나는 몸서리친다. 학생들이 내뿜는 침묵의 ‘거부의 화살’을 또 얼마나 많이 맞아야 할 것인가.



 특히 남학생들에게 “‘페미’ 묻은 것은 ‘믿거(믿고 거른다)’”의 대상이다. 이게 요즘 학생들의 보편적인 감수성인지는 내 알 길이 없으나 학원에 있다보면 자주 마주하게는 된다. 거기다 대고 “페미니즘은 옳고, 너희들은 틀렸다”고 말해봐야 가닿을 리 없다. 그건, 우린 어차피 다른 세계에서 살고 말 거라는 단절의 선언이다. 나는 그들을 손절하고 살 수 없다. 얘야, 월급은 받아야지.



 그러므로 나는 이야기 해야만 한다. 여성 차별은 현존하지 않는다는 말에 대하여, 여성을 우월하게 여기는 페미니즘은 공정하지 않다는 말에 대하여, 여성적 어조를 여성적 어조라 부르는 것이 왜 성차별이냐는 말에 대하여.



 - ‘실업은 없다’고 생각한대서 실업 ‘문제’가 없어지지 않는 것처럼, 페미니즘을 지워버린대서 이 사회에 존재하는 여성 차별 문제가 없어지진 않는다. 그건 실증적 분석으로 이야기 할 영역이다. 너희들의 믿음을 뒷받침하는 통계를 내놓아라. 물론 없겠지. 너희들은 통계를 보고 그런 생각을 가진 게 아니라 그저 디씨나 보며 선동당한 ‘편견 덩어리’들이니까!


 - 공정? 공정이 뭔데. 너희들이 나한테 매달 꼬박꼬박 바칠 돈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불공정이다. 목동, 대치동에 몇 백 씩 쏟는 애들은 욕하면서, 설마 니들은 지금 공정하게 경쟁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니? 나 같은 강사 안 만났으면 니들 성적이 올랐겠니? 그러니 ‘지역균등선발전형’이 있는 것인데, 하물며 함께 평등하자는 말이 어찌 불공정하단 말이냐.


 - 비격식체를 자주 쓰는 게 ‘여성적 어조’면 나는 단 한 명의 남학생도 가르치고 있지 않다. 난 너희에게 ‘하십시오’체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니 난 앞으로 너희를 여성으로 여기겠다. 너희가 다시 남성이 되는 법은 매우 간단하다. ‘여성적 어조’라는 말을 없애면 된다.



 저 강사 페미 묻었네, 믿고 걸러야겠다,고 생각한다면 도리가 없다. 하찮은 너희들을 포기않고 계속 대화를 시도해야 하는 것이 그저 내 ‘슬픈 천명’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한 줄 시를 적어볼까.






 혐오와 차별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그 자체로 마땅히 옳은 말 앞에서 나는 가끔 의아해진다. ‘싸운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일까. 그것이 표현 그대로 전쟁을 뜻하는 거라면, 상대를 절멸하는 것이 싸우는 것의 궁극적인 목표가 된다.



 나는 혐오와 차별을 박멸하기 위해 투신하는 전사들을 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장애인차별철폐를 위해, 젠더 해방을 위해, 노동 해방을 위해, 모든 ‘옳음’을 위해 싸우는 불굴의 투사들을 분명 알고 있다. 그들을 존경해마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 앞에서 나는 옳음을 과연 옳게 전달할 수 있는지 회의하는, 용서받지 못할 비관주의자에 가깝다.



 옳은 말의 무력함을 자주 떠올린다. 내 말이 누군가에게 가닿지 않을 때의 망연함을 안다. 그럼에도 필요한 건 '옳은 말의 나열'이 아니라 '옳은 말과 논쟁시키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상대를 내적으로 무너뜨릴 수 있는 일이다. 또한 그건 상대를 '계몽'시키는 데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옳음'을 계속 생각해보는 일이기도 하다. 내 '옳음'이 흔들리고 있지 않다면, 그건 위험한 편향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편향이 곧 옳지 않음은 아니다. 그러나 위험한 편향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토록 망가뜨린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시비를 걸고, 대화를 시도하고, 논쟁을 걸어야만 한다. 그것이 우리가 '옳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과정이다. 사소한 밥벌이 중에도 내가 깨달은 게 있다면 이 정도이다. 나는 그 수 말고는 하찮은 자들과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같잖겠지만 그것이 내가 아는 '싸운다'는 말의 뜻이다.



 나는 학생들을 사랑한다. 너희들 덕분에 내가 먹고 산다. 고작 밥벌이나 생각하는 나에 비해 훨씬 너른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회를 사랑하므로 결국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생각할 때면 금방 부끄러워진다. 그러다 별 수 없이 그저 나의 사랑이나 열심히 하자고 생각한다. 고객님들을, 포기하지 말자고 다짐한다.



 적어도 너희와 만나는 동안에는 여성적 어조를 여성적 어조로 남길 수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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