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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랑 Jul 20. 2021

"나는 국어를 가르친다"는 틀린 문장입니다

밥벌이로서의 사교육 이야기 #7

 

 남의 글을 읽는 것이 괴롭다. 책에서 자주 탈출하여 혼자 골똘해진다. 가령 얼마 전에 읽은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유나는 가끔씩 주어가 생략된 문장을 쓰곤 해. "카톡이 왔다"라든지, "싫다고 한다"라든지, "입속으로 들어간다"라든지, 누가 혹은 무엇이 그렇게 되고 있는지를 알려주지 않는 과감한 생략을 하지.


 이 구절을 읽고 나는 더이상 책에 집중하지 못했는데, 내가 아는 한 "카톡이 왔다"라는 문장에는 '카톡이'라는 주어가 있기 때문이다. '누구로부터'를 말하고 싶었던 거라면 그건 부사어에 해당한다. 유나는 주어를 생략하지 않았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문장에 발목을 잡혀버린 후로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래서 '-로부터 카톡이 왔다'라고 문장을 고치면 '로부터'라는 조사의 쓰임새는 적절한가? 찾아보니 이건 또 번역투의 문장이란다. "'-로부터'보단 '-에게서'로 고치는 것이 한국어에서는 더 자연스럽다." 한창 문법 교재를 뒤적이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얘야, 너는 국어 강사잖아. 네가 헷갈리고 있으면 어떡하니.


 주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이고 어디로부터 왔는가. 이 문장은 비문인가 아닌가. 이 문장이 비문이라면 그 이유를 학생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면 급격히 피로가 몰려온다. 그만 하자. 나는 책을 덮는다. 대체 확실히 아는 게 아무 것도 없구나. 결국 타인의 글을 읽고 확인하는 것은 나의 부족함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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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는 교재를 읽는데 "나는 국어를 가르친다"가 틀린 문장이라고 나와 있었다. 아니 대체 왜? 더 읽어보니 이 문장을 올바르게 고치려면 "나는 <누구에게> 국어를 가르친다"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르치다'는 세 자리 서술어, 목적어와 부사어를 필수 성분으로 가지므로 필수적 부사어에 해당하는 '-에게'가 꼭 들어가야 한다. 아니, 씨팔, 이걸 어떻게 알아요. 이 신묘한 규칙 앞에서 나는 또 교재를 탈출하여 혼자 골똘해진다.


 가르친다는 것은 '-을'만이 아니라 '-에게'도 중요하다. 너는 지금 술자리에서 잡지식이나 자랑하자고 국어를 공부하는 게 아니다. 너는 ‘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것이다. '무언가를' 가르치기 위해선 '누구에게' 가르치는 건지 역시 골똘히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가르친다'는 것의 성패를 좌우한다. 너는 너의 지식을 '자랑'하는 데서 그치는 사람이냐,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이냐. 그러니 너의 밥벌이는 결코 가볍지 않다. 우습게 여기지 마라. 네가 하는 일을, 우습게 여기지 말라. "너는 '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친다."


남의 글을 읽는 것이 괴롭다. 날마다 '나는 모른다'는 것만 깨우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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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시 공부가 싫어서 고등학교를 자퇴했는데 사교육이라는 입시 감옥의 교도관이 되어버리다니. 변절도 이런 변절이 없잖아. 어떻게 너(a.k.a 자퇴생 혹은 좌파)가 학벌 사회를 공고히 하는 사교육을 하고 있냐고 누군가 꾸짖으면 변절자로서 주눅이 든다. 정말 그렇기 때문이다. 문학 문제를 잘 풀 줄 알아야 '좋은' 대학을 간다, 국어가 입시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아느냐, 운운.


 그러나 일방적으로 매도당하면 괜히 또 뾰루퉁해지는 것이, 내가 가르치는 건 다른 말로는 이 사회의 '생존능력'이기 때문이다. 좋은 학벌을 얻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게 따지면 나 먼저 죽어야 한다. 단지 말하고 싶은 건, 괴로운 것을 해내고야 마는 '끈질김'에 대해서다.


 남의 글을 읽는다는 건 괴로운 일이다. 남의 서사를 이해하고 그걸 통해 제 삶을 고민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괴로운 짓거리를 해야만 한다. 모두가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한 사회의 '지식'을 소수의 사람들이 독차지하는 사회가 바로 계급 사회의 원형이다. 그러므로 읽고 쓴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빼앗으려는 '똑똑한 자'들에게 맞서는 일이다. 그걸 위해서라면 난 이보다 더 무례해질 수 있다. 학생들에게 읽고 푸는 것을 강제하는 내 일이 결코 부끄럽지 않다. 강제의 다른 말은 ‘의무’이다. 의무 교육은 민주주의의 발명품이었다.


 나는 분명 잘난 청소년이었다. 학교를 나와서도 혼자 읽고 쓸 줄 알았다. 많은 똑똑한 사람들 역시 그랬을 게다. 그러나 본인들의 경험과 기억만으로, 공부는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청소년들을 내버려둔다면 그건 자유를 주는 게 아니라 혼란을 주는 일이다. 그런 태도를 마주할 때면 나는 생각하게 된다. '-을' 말했다는 것만으로 '-에게'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의 그 '무책임'에 대하여.


 물론 이런 말들로 학벌 사회의 모든 비극을 정당화 할 수 없다. 비극은 보탤 말 없이 비극적이다. 그러나 이것이 죄악으로 쌓아올린 성채, 따위로 뭉뚱그려지는 것 역시 마뜩찮다. 특히나 똑똑한 자들이 그런 소리를 해대고 있을 때, 나는 정말로 소리 지르고 싶다. 당신들이 해야 할 것은 배움을 무너뜨리는 일이 아니라 배우는 자들 옆에 서있는 거라고. 교육을 탓하고 말 게 아니라 교육하는 사람들과 함께 더 나은 교육을 고민하는 거라고. 괴로운 일을 안 시키는 것이 아니라 괴로운 일임에도 함께 견딜 수 있게 만들어주는 거라고, 정말이지 외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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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의 글을 읽는 것이 괴롭다. 나의 무지를 매번 확인하는 것이 지친다. 하물며 너희들의 괴로움이란. 나는 오늘도 강제로 읽힌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황동규, <즐거운 편지>).


 이 시의 주제가 무어냐. 외사랑이다, 이것이다. 사소하겠지만, 당신이 괴로움에 헤매일 때에 당신을 끝까지 생각하겠다고, 적어도 나는 포기 않겠다고. 마치 너희를 향한 나의 사랑과 같지 않니? 응, 아니야. 학생들은 나의 농을 결코 받아주지 않는다. 어쩌랴, 안 받아줘도 기다리겠다는 것이 또한 시가 말하려는 것일진대.


 처음으로 <즐거운 편지>라는 시를 읽었던 적을 떠올린다. 중학생이었다. 모두가 졸고 있었고, 정말로 재미없었던 국어 선생이 앞에서 그저 자습서나 읽어댈 뿐이었지만, 이 시에 대한 해석을 듣고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던 기억을 잊지 못한다. 이거, 내 마음이잖아. 따분한 일상에서 아주 찰나에 스친 감동이, 결국 나를 이리 이끌었다. 그 사소함이 역시 우리를 구원하리라 믿는다.


 그러니 이 모든 괴로움 속에서도 언젠가 내게 스친 찰나의 감동이 당신들에게도 불현듯 가닿기를, 나는 그저 바랄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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