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강의 『채식주의자』-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나뭇가지처럼 말라가는 영혜는 자신이 이제 곧 나무가 될 거라고 말한다.

by Someday



「채식주의자」

'언제나 과분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인 나의 눈에, '김영혜'는 예쁘다거나, 총명하다거나 눈에 띄게 요염하다거나, 부유한 집안의 딸이 아니었기에 평범한 직장인인 내게 적당한 신붓감이었다.

결혼 후에도 아내는 말수가 적은 편이었고, 나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일도 드물었고, 귀가시간이 아무리 늦어도 관여하지 않았다. 휴일에도 어딘가로 외출하기를 청하지도 않았며,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한 아내 역할을 무리 없이 해내고 있었다.

결혼 5년 차에 접어들었으나, 나는 애초에 영혜를 열렬히 사랑하지 않았으니 특별히 권태로울 것도 없었다. 2월 새벽, "꿈을 꿨어"라며 어두운 부엌에 서 있던 아내는 그다음 날 냉장고 속에 있던 모든 고기 꾸러미들을 쓰레기봉투에 넣어버린다.

나는 별안간 채식주의자라도 된 듯 전혀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는 김영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아내의 언니인 인혜의 아파트 입주 집들이에서 처가 식구들에게 아내의 이상 행동을 알리고, 해결해 보기로 한다. 집들이에서도 영혜는 육식을 계속 거부한다.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장인은 강제로 딸의 입에 고기를 쑤셔 넣었고, 그래도 계속 강하게 거부하는 작은 딸에게 호된 따귀세례 날렸다. 영혜는 그 자리에서 칼을 빼들고 자신의 손목을 긋는다.




「몽고반점」

영혜의 형부이자, 인혜의 남편인 나는 비디오 아티스트이다. 어느 날, 아내 인혜에게서 처제 영혜의 엉덩이에 아직도 몽고반점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나는 처제의 육체를 갈구하는 욕망을 품게 된다. 나는 영혜를 찾아가 비디오 작품의 모델이 되어달라고 청한다. 결국, 나는 영혜의 전신에 꽃을 그려 넣고 만족스러운 비디오 촬영을 하게 되지만, 나의 욕망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나 자신의 몸에 꽃을 그려 영혜와 교합까지 한 뒤 비디오 작품을 촬영하게 되고, 스스로 만족스러움에 희열을 느꼈다.

그러나 다음 날, 벌거벗은 나와 영혜 두 사람의 모습을 아내인 인혜가 발견했다.

인혜는 동생 영혜도, 나도 치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아내의 말의 진의는 '나한테 정신병원에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독자들은 「채식주의자」와 「몽고반점」에서 영혜 남편인 '나'와 영혜 형부인 '나'를 통해 영혜를 마주할 수 있었다면, 다음에 이어지는 「나무 불꽃」에서는 제삼자처럼 등장하는 인혜 '그녀'의 눈을 통해 점점 더 세상과 소외되어 가는 영혜를 만나게 된다.



「나무 불꽃」

이제 인혜는 가족들 모두 등 돌린 동생 영혜의 병시중을 책임져야 했다.

'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그 웃음의 끝에 그녀는 생각한다. 어떤 일이 지나간 뒤에라도, 그토록 끔찍한 일들을 겪은 뒤에도 사람은 먹고 마시고, 용변을 보고, 몸을 씻고 살아간다. 때로는 소리 내어 웃기까지 한다. 아마 그도(인혜의 남편)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 잊혔던 연민이 마치 졸음처럼 쓸쓸히 불러일으켜지기도 한다.' - 본문 247쪽



'축성산'에 있는 정신병원에 남겨진 영혜는 고기를 거부하는 것을 넘어 아예 음식을 거부하면서 스스로 나무가 되고자 했다.

영혜는 식음을 전폐했고, 수액이나 미음을 먹이기 위한 링거조차 강하게 거부했다. 나뭇가지처럼 말라가는 영혜는 자신이 이제 곧 나무가 될 거라고 말한다. 그녀는 모든 치료와 모든 음식을 거부하고, 이곳 정신병원에서 벗어나길 원하는데.....


수록 작품의 발표 지면


김영혜는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받은 폭력의 각인을 지우지 못한 채 살다가, 결혼 5년 만에 철저히 육식을 거부하는 채식주의자가 되어 버린다. 상처로 남겨진 폭력성 때문이었을까? 영혜는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다른 생명에게 어떠한 해도 끼치지 않는 무해한 존재를 꿈꾸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그녀는 모든 상처를 끌어안은 채 나무가 되기를 꿈꾼다.


한강 작가는 「채식주의자」 개정판을 출간하면서 '새로 쓴 작가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고백하자면 이 책에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귀밑머리가 희어지고 어느 때보다 머리가 맑은 지금, 나에게는 이 소설을 껴안을 힘이 있다. 여전히 생생한 고통과 질문으로 가득 찬 이 책을” - 2022년 이른 봄에, 한강

작가는 '영혜'라는 채식주의자를 통해 각자 저마다에게 각인된 고통의 근원과 원인을 파고 들어가려 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본질에 대해 쉼 없이 질문하는 일은 ‘고통’에 마주하는 용기일 수도 있으며, 풀리지 않던 매듭을 풀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