솜사탕처럼 깨끗한 ‘하얀’과 달리 ‘흰’에는 삶과 죽음이 함께 배어있다.
검은 활자를 읽어 내렸지만, 내 머릿속에는 무채색의 다양한 그림들이 그려졌다.
까만 단어들이 문장으로 이어졌고, 그 문장이 그려내는 화폭들이 천천히 이어져 생생하게 살아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강 작가의 '모든 흰'이 마치 여러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이어지는 듯한 눈부심을 오감으로 느꼈다.
절제된 단문형 문장이 작가 스스로에게는 차갑고 비호의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책 속에서 그의 손을 곱게 만들던 차가운 흰 눈송이,
물큰하게 얼굴을 적시던 진눈깨비는,
우리의 삶 속에서 양립하고 있는 빛과 그림자를,
그리고 영원할 수 없는 존재의 유한성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2024년 10월 노벨 수상 시, 한강 작가는 노벨 위원회와의 인터뷰에서 '작품 『흰』은 자전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간 매우 개인적인 책'으로 추천했다. “솜사탕처럼 깨끗하기만 한 ‘하얀’과 달리 ‘흰’에는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함께 배어 있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은 『흰』 책이었다." 『흰』 책 속에는 63편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문 - 문 위에 붓질을 할 때마다 더러움이 지워졌다. 송곳으로 그은 숫자들이 사라졌다. 핏자국 같은 녹물들이 사라졌다..... 페인트 통과 붓을 들고 엉거주춤 서서, 수백 개의 깃털을 펼친 것처럼 천천히 낙하하는 눈송이들의 움직임을 나는 멍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흰 도시 - 오래된 아랫부분과 새것이 윗부분을 분할하는 경계, 파괴를 증언하는 선들이 도드라지게 노출되어 있는 도시에서 이 도시와 같은 운명을 가진 어떤 사람, 한차례 죽었거나 파괴되었던 사람, 그을린 잔해들 위에 끈덕지게 스스로 복원한 사람, 그래서 아직 새것인 사람, 어떤 기둥, 어떤 늙은 석벽들의 아랫부분이 살아남아, 그 위에 덧쌓은 선명한 새것과 연결된 이상한 무늬를 가지게 된 사람.
어둠 속에서 어떤 사물들은 - 희어 보인다. 어렴풋한 빛이 어둠 속으로 새어 들어올 때, 그리 희지 않던 것들까지도 창백하게 빛을 발한다... 이 도시와 비슷한 어떤 사람의 얼굴을 곰곰이 생각했다. 그 윤곽과 표정이 서서히 뚜렷해지길 기다렸다.
눈송이들 - 엉망으로 넘어졌다가 얼어서 곱은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서던 사람이, 여태 인생을 낭비해 왔다는 걸 깨달았을 때,
씨발 그 끔찍하게 고독한 집구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게 뭔가, 대체 이게 뭔가 생각할 때,
더럽게도 하얗게 내리는 눈
진눈깨비 -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그 사실을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이마를, 눈썹을, 뺨을 물큰하게 적시는 진눈깨비.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 사실을 기억하며 걸을 때, 안간힘을 다해 움켜쥐어온 모든 게 기어이 사라지리란 걸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것. 얼음도 아니고 물도 아닌 것. 눈을 감아도 떠도, 걸음을 멈춰고 더 빨리해도 눈썹을 적시는, 물큰하게 이마를 적시는 진눈깨비.
입김 - 추워진 아침, 입술에서 흰 입김이 새어 나오고,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 우리 몸이 따뜻하다는 증거, 차가운 공기가 캄캄한 허파 속으로 밀려들어와, 체온으로 덮여져 하얀 날숨이 된다. 우리 생명이 희끗하고 분명한 형상으로 허공에 퍼져나가는 기적.
각설탕 - 이따금 각설탕이 쌓여있는 접시를 보면 귀한 무엇인가를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모래 - 그녀는 자주 잊었다. 자신의 몸이(우리 모두의 몸이) 모래의 집이란 걸.
부스러져왔으며 부스러지고 있다는 걸.
끈질기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다는 걸.
백열전구 - 아무런 고통도 겪지 않은 사람처럼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아 있다.
방금 울었거나 곧 울게 될 사람이 아닌 것처럼.
부서져본 적 없는 사람처럼.
영원을 우리가 가질 수 없다는 사실만이 위안이 되었던 시간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흩날린다 - 저물기 전에 물기 많은 눈이 쏟아졌다. 보도에 닿자마자 녹는 눈, 소나기처럼 곧 지나갈 눈이었다.
잿빛 구시가지가 삽시간에 희끗하게 지워졌다. 갑자기 비현실적으로 변한 공간 속으로 행인들이 자신의 남루한 시간을 덧대며 걸어 들어갔다. 그녀도 멈추지 않고 걸었다. 사라질 -사라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통과했다. 묵묵히.
넋 - 부서져본 적 없는 사람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어 여기까지 걸어왔다. 꿰매지 않은 자리마다 깨끗한 장막을 덧대 가렸다. 결별과 애도는 생략했다. 부서지지 않았다고 믿으면 더 이상 부서지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니 몇 가지 일이 그녀에게 남아 있다;
거짓말을 그만둘 것.
(눈을 뜨고) 장막을 걷을 것.
기억할 모든 죽음과 넋들에게 -자신의 것을 포함해- 초를 밝힐 것.
백지 위에 쓰는 몇 마디 말처럼 - 물큰하게 방금 보도를 덮은 새벽 눈 위로 내 검은 구두 자국들이 찍히고 있었다.
백지 위에 쓰는 몇 마디 말처럼.
떠날 때 아직 여름이었던 서울이 얼어 있었다.
뒤돌아보자 구두 자국들이 다시 눈을 덮이고 있었다.
희어지고 있었다.
침묵 - 길었던 하루가 끝나면 침묵할 시간이 필요하다. 난롯불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하듯, 침묵의 미미한 온기를 향해 굳은 손을 뻗어 펼칠 시간이.
작별 -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말을 모르던 당신이 검은 눈을 뜨고 들은 말들 내가 입술을 열어 중얼거린다. 백지에 힘껏 눌러쓴다. 그것만이 최선의 작별의 말이라고 믿는다.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