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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이 Oct 27. 2024

안전수칙



지금까지 내 인생에는 수많은 흔들림이 있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흔들림이 있을지, 그 규모는 어떨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나는 마음껏 흔들리기로 했다. 몸에 힘을 빼고서. 지진 시 비상대피경로를 확보하듯이 내 도피처를 확보하면서. 이건 단순히 회피하기 위한 게 아니라, 스트레스를 적절히 조절하면서 나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나는 기꺼이 이 흔들림을 즐기기로 했다. 






P시는 심리적 외상을 최소화하기 위한 지진 초동대응 지침서를 발간했다. 지침서는 튀르키예 지진이나 지진이 많이 발생하는 일본에서 응급 지원을 어떻게 하는지 참고해 제작했다고 한다. 지침서는 지진 발생 일주일을 1단계, 한 달을 2단계로 나눈 뒤 시기별로 지진 피해자 응대 방법을 세분화했다. 국내에 지진에 특화된 초동대응 수칙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한편, P시에서는 지진을 견뎌낸 시민들의 이야기를 다룬 연극이나 공연이 주기적으로 열렸다. 지진 트라우마를 예술로 승화한 것이었다. 지독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공연을 관람하면서 비로소 1111지진과 거리를 확보하고, 관찰자 입장에 놓일 수 있었다. 길거리 색칠 봉사나 벽화 그리기 봉사, 악기 연주 봉사를 하며 지진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있는 청년들도 늘어났다. 그들의 상처가 아물기 시작하는 조짐이 보였다.






행정안전부는 지진으로 흔들리는 동안은 탁자 아래로 들어가라, 건물 밖으로 나갈 때는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라, 대피할 때는 운동장이나 공원 등 넓은 공간으로 대피하라는 등의 내용이 포함된 7가지 지진행동요령을 발표했다.


나도 나를 보호하기 위한 지침을 세웠다.


-잘 먹고 잘 자기

-매일 같은 시간에 자고 일어나면서 규칙적인 생활하기

-꾸준히 운동하기 (유산소, 웨이트 병행)

-사람을 판별하는 기준을 세워 나를 좀먹는 관계 정리하기

-비상대피로 만들기(스트레스 해소 창구가 되는 취미활동: 러닝, 테니스, 영화감상, 독서)

-현재에 충실하기

-많이 웃기

-마음껏 감탄하기

-매사에 감사하기

-사람이든 물건이든 주변에 너무 많은 것을 두지 않기

-나를 믿고 사랑하기

-몸도 마음도 항상 청결히 유지하기

-간소하고 단순하게, 꾸준히, 그리고 묵묵히 전진하기


내 인생을 위한 안전수칙. 너무 당연하고 지극히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데도 막상 실행에 옮기려면 어려웠다. 너무 이상적이고 막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 안에 충분히 많은 기둥들이 이미 세워졌기 때문일까. 이것들만 실천하면서 살아가면 유연하되 단단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건 내 인생을 위한 내진설계니까. 


안전지대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안식처를 만들어 가야지. 나는 두려움과 불안 대신 설렘과 기대로 30대를 맞았다.






나만의 안정적인 삶을 위한 수칙을 철저히 지키며 지내던 어느 날, S영화사 윤 대표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하 씨, 오랜만이에요. 다름이 아니라, 같이 영화 작업을 좀 진행하고 싶은데. 혹시 시나리오를 의뢰해도 될까요?"

시나리오 작업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제가 할 수 있을까요?"

"그럼요. 1111 지진과 관련된 재난 영화예요."

"아……."

"이 얘길 지하 씨만큼 잘 쓸 수 있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어요. 구상해 둔 시놉시스는 대강 있는데, 구체화해서 플롯을 좀 더 발전시켜 나갔으면 하거든요. 지하 씨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해요."


내 글이 드라마나 영화가 된다면 어떨까, 시나리오를 써보면 어떨까는 막연하게 생각만 했던 일이라 막상 기회가 주어지니 얼떨떨했다. 나는 윤 대표의 제안을 받아들여, 과감히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완전히 몰두해 본격적인 시나리오 작업에 돌입했다. '먹고 자고 싸고'가 아니라, '먹고 자고 쓰고'하는 삶이 이어졌다.






시나리오를 완성한 날 밤, 자려고 누웠는데 우르르하는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여진인가.

나는 분명 흔들렸으나, 웬일인지 그리 두렵지 않았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P시는 가상의 공간입니다. 인물과 사건 역시 모두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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