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하."
"네."
다행히 수업 시간에 늦지 않게 강의실에 도착했다. 이 교수님은 전자출결을 하지 않고 꼭 귀찮게 굳이 이름을 불렀다. 책상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충 대답하다 문득 내 손등에 긁힌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뭐지, 언제 어디서, 어쩌다가 생긴 걸까. 책 같은 거 넘기다가 베인 건가. 상처를 문지르다 갑자기 눈물이 고였다.
요즘 부쩍 갑자기 이유 없이 눈물이 나는 일이 많아졌다. 서러운 것도 억울한 것도 기분이 안 좋은 것도 아닌데 자꾸만 그랬다. 지진이 발생하기 전, 전조현상으로 해수면이 증가하듯이 내 삶의 어떤 흔들림을 예견이라도 하듯 눈물이 내 안에서 찰방찰방 대다가 시도 때도 없이 울컥울컥 솟아올랐다. 내 안에 해수면이 있다면 그게 넘실대며 넘쳐 버리기라도 한 걸까.
울면 엔도르핀이 분비돼 기분이 한결 개운해진다던데. 이유 없이 눈물이 나는 건, 뇌가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증거라던데. 나도 그런 걸까. 아무 문제도 없이 그저 열심히 살고 있는데. 도대체 왜, 뭐 때문에.
알 수 없었다. 요즘 부쩍 정신을 놓고 다닌다. 학교 수업과는 별개로 영화잡지사에서 주최하는 공모전에 낼 글을 쓰느라 정신없이 바쁘기 때문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에 관해 써야 할지, 남들은 잘 다루지 않을 만한 장르의 영화를 선택해 희소성으로 승부해야 할지 고민하면 할수록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여러 편의 글을 쓰고 나중에 고르기로 했더니 일이 많아졌다.
정신없는 와중에 한 언론사 하반기 채용 연계형 인턴에 지원했고, 저번 주에 최종 면접까지 마쳤다. 오늘은 대망의 결과가 나오는 날이라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 학기를 잘 마무리하고, 방학 동안 인턴을 하고 나면 어느새 졸업일 것이다. 인턴 생활을 훌륭히 끝내고 정규직으로 전환되어 내년에는 기자로서의 생활을 시작하는 것, 그게 내 근시안적인 목표이자 계획이었다. 결국 이렇게 전공을 살려 글을 쓰는 직업을 갖게 되는 걸까. 참 따분하고 재미없는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지이잉.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학교 잘 갔어?'
은위였다. 은위랑은 몇 주 전에 사귄 지 5주년을 맞았었다. 그날 우리는 나름 특별한 날이랍시고 조촐하게 케이크를 하나 사서 먹었고, 촛불을 불었는지 안 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맛있는 거나 먹자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음식점에서 맛이 기억나지 않는 파스타를 먹었다. 그러다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영화(아마도 보다가 중간에 잠들었기 때문일 것이다)를 보고, 역시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카페에 들어가 신 맛이 났는지 고소한 맛이 났는지 기억나지 않을 커피를 마시고 헤어졌다.
은위랑 같이 있으면서도 나는 줄곧 최종 면접과 영화 공모전에 낼 글 생각뿐이었다. 은위는 늘 그렇듯 똑같은 표정과 똑같은 말투와 똑같은 온도였다. 은위는 그날 전혀 서운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내가 다른 데 정신이 팔려있는 걸 눈치 채지조차 못했을 것이다.
'응, 아침 잘 챙겨 먹었어?'
나는 대충 답장했다.
'샌드위치 먹었어. 지하는?'
늘 참치 샌드위치 아니면 삼각김밥으로 아침을 먹는 은위. 답장을 하지 않고 있었더니 머지않아 또 한 번 지잉 하면서 진동이 울렸다.
'수업 중이지? 끝나고 연락해!'
나는 아무런 답장을 하지 않은 채로 그저 멍하게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또 지잉, 진동이 울렸다. 아 표은위, 진짜. 수업 끝나고 연락하라더니 왜 자꾸 보내. 속으로 생각하며 잠금화면으로 슬쩍 보는데 '귀하의 OO신문 하반기 채용연계형 인턴 최종 합격을 축하드립니다.…'가 보였다. 기쁜 마음에 바로 잠금을 해지해 문자를 확인했다. 출근 전에 필요한 서류를 추가로 제출하고 계약서를 쓰러 회사에 방문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다음 달 종강 이후 바로 출근하게 된다. 악! 합격이라니. 내가 기말고사에 공모전에 면접준비까지 하면서 얼마나 바쁘게 지냈는데. 이 정신없었던 한 달이 보상받는 기분이라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는구나. 이제 공모전 글을 마무리해서 얼른 내고, 기말고사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으로 잘 마무리하고, 인턴 생활에 집중하면 될 터였다. 새로운 생활의 시작. 느낌이 좋았다. 아침의 불길한 꿈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수업은 안 듣고 열심히 머릿속으로 계획을 굴리다 교수랑 눈이 마주쳐서 황급히 눈을 깔고 책상에 놓인 책을 보고 있었다. 그때 책이 좌우로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책상이 흔들린 걸까? 순간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꼈고, 고개를 젖혀 눈을 감았다. 5초쯤 감고 있다 눈을 떠서 천장을 봤더니 천장도 왔다 갔다 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요즘 잠을 잘 못 자서 그런가. 이젠 천장까지 흔들리네. 느릿느릿한 호흡과 답답한 발성의 교수님 목소리가 들려오자 어지러움이 한층 배가 되는 것 같았다. 아, 어지럽다.
삐, 삐, 삐, 삐, 삐.
희뿌연 교수님의 목소리를 날카로운 경보음이 찢고 들어왔다. 긴급재난문자였다.
"너네들 수업 시간에 휴대폰 안 꺼놓니."
교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누가 수업시간에 핸드폰을 꺼두나요. 그냥 무음이나 매너모드 해놓지. 그런데 무음을 해놓든 매너모드를 해놓든 재난경보는 울린답니다. 그래야 재난상황을 피할 수 있지 않겠어요? 무심한 교수에게 속으로 반박하면서 무심결에 확인한 긴급재난문자를 보고, 나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고 말았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은 모두 허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