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에도 보기에도 먹기에도 좋은 양재천 길, 20,000보
개화가 늦어졌다 걱정하는 소리가 여기저기 들렸지만 올 해도 꽃은 폈다. 주말 아침, 아내와 함께 아주 오랜만에 양재천에 도착해 운 좋게 주차를 하고 먼발치서 전경을 눈에 담아 본다. 눈길 닿는 천지가 벚꽃이고 그 속에 노란색이 진한 자태를 드러낸다. 이른 시간이지만 축제를 준비하는 사람들, 달리는 크루들, 자전거 타는 사람들, 벚꽃 속에서 사진 찍는 사람들도 이미 꽃 반, 사람 반이다.
올해 핀 벚꽃을 보는 게 일차 목적이긴 했지만 더 큰 목적은 양재천 주변 동네를 둘러보는 거였다. 양재천 주변은 오래전부터 맛집, 카페, 브런치 레스토랑 등이 자리 잡으며 조용한 트렌드세터 역할을 톡톡히 해 온 지역이다.
양재천 - 걷기 좋은 길
양재천 길은 강남구, 서초구에 걸쳐 벚꽃이 조성된 2단 산책로가 있고 천변에 자전거길, 달리기 길로 구성돼 마치 3단 케이크처럼 보인다. 이번 시즌에는 양재천 변에 여러 국내 작가들의 조각과 조형물까지 더해져 걷고 보는 즐거움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 근처에 오래 다닌 치과가 있어 진료를 마치면 산책로 벤치에 커피 한 잔 들고 앉아한 동안 멍 때리곤 했는데 그때마다 이 길이 참 부러웠다. 서울 시내 곳곳에 산책로가 있고 한강을 둘러싼 공원들이 많지만 이곳 양재천은 그런 곳 들에서 느낄 수 없는 넉넉함과 고즈넉함이 잘 버무려진 길을 갖고 있다.
양재천 – 볼거리 많은 길
양재천에 올라와 작은 도로를 건너면 두 구에 걸쳐 주택가를 아우르며 다양한 먹거리, 살거리, 볼거리 가게들이 곳곳에 조용히 자신들만의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다가구와 오래된 아파트, 그리고 다가구가 있던 자리에 들어선 신축 건물들이 어우러져 대한민국 주거, 사무공간의 변화를 길을 걸으며 체감할 수 있는데 다른 지역에 비해 유달리 건축사무소와 디자인 사무실이 신축 건물 안에 많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건물 이름도 이전의 “OX빌딩” 같은 구태를 벗어나 멋스러운 이름을 갖고 있다. 건물의 색감도 봄 햇살 아래 비비드함의 끝을 보여준다.
길을 걷다 보면 눈길 끄는 간판들을 마주하게 되는데 심미적으로도 기능적으로도 칭찬할 만한 하다. 주변 환경에 살포시 묻히며 여기가 뭐 하는 덴 지, 뭘 파는 곳이지를 슬며시 내비친다. 댄스스쿨, 와인바, 꽃집, 일본 애니메이션 주인공이 생각나는 오래된 소품 가게 등 억지로 나를 봐 달라고 하는 게 아닌, 저절로 눈길이 가게 만드는 간판이 참 예쁘다. 걷던 중, 조그만 과일가게를 발견했다.
이름이 “조효(朝曉)”. 어렵다. 궁금해 안에 들어가 젊은 주인장과 몇 마디 나누며 그 가게의 콘셉트와 지향하는 바를 듣고 ‘아하’했다. 과일 편집샵이다. 가게 내부에 키치스럽게 걸어 놓은 문구들 안에 주인장의 과일을 대하는 태도, 손님을 대하는 방법이 남다름을 느꼈다.
양재천 – 먹거리 많은 길
동서양, 과거 현재 등, 일단 모든 먹거리가 충만하다. 전통 한식, 예를 든다면 청국장집부터 트렌디한 브런치카페, 브라세리, 파티세리, 퓨전 식당 등, 웬만한 기호는 모두 맞출 만큼 다양하다.
걷다가 양재천 끄트머리 즘 왔을 때, 눈을 감고도 가게를 찾을 수 있을 만큼 후각을 강하게 자극하는 크루아상 냄새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 안 들어갈 수가 없었다. 가게들 들어가니, 반갑게 들여오는 인사말 “봉쥬르”. 아 프랑스 빵집이네. 메뉴판 없이도 맛봐야 할 빵이 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벵오쇼콜라”, “크루아상”. 계산대에 서니 아주 재미난 패널 두 장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서울여자와 파리지엥 남자가 만나 부부가 되었습니다. Cre + Miel.” 두 사람 이름 앞 글자와 크림, 꿀을 조합한 다양한 의미의 가게 이름 설명까지. 코로 느끼는 즐거움을 넘어 눈으로도 즐거운 빵집이었다.
빵을 떼어먹으며 다시 양재천을 길을 걷다 만보기를 보니 20,000보를 넘었다. 아 많이 걸었네. 20,000보가 더 귀하게 느껴진 양재천 소풍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