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하는 그 VS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
"예전에 우리 처음 만났던 장소 기억나?"
갑자기 그가 결혼 전 이야기를 꺼냈다.
그의 물음에 그녀는 머리를 굴리기에 바빴다. 대충 장소가 어디 위치했고 어떻게 마주 앉았는지는 기억했지만, 그가 꺼낸 첫마디가 무엇이었는지 그때 그녀가 어떤 표정으로 앉아있었는지 기억이 도통 나지 않았다.
굳이 생각할 필요를 못 느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지나간 추억을 생각하기에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 걸까?
"기억 안 나는데......"솔직하게 그녀는 말했다. 첫 만남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실망스러웠는지 그때 어떤 상황인지 조목조목 이야기하는 그와는 달리 그녀는 딴생각으로 그가 말하는 이야기를 흘려보냈다.
그는 기억을 잘한다. 사진을 찍는 듯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포즈로 어떻게 이야기를 하는지 이미지화해서 기억한다. 소위 지금 우리나라 교육에서 필요한 메타인지, 즉 융합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또렷하게 기억하는 그도 기억 못 하는 경우가 있다.
술로 떡이 되었을 때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행동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의심한다. 그토록 기억을 잘하는 그가 정말 '술'로 기억을 못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 부끄러운 상황을 피하기 위해 기억하지 못한다는 거라 그녀는 생각했다.
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하는 핑계가 술 마셔서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면 다 통과된다고 밀어붙이는 안일한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반면에 그녀는 기억하는 게 어렵다.
뒤돌아서면 다 까먹는다. 책을 읽지만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 속상할 때가 많았다. 그런 그녀는 방법을 찾았다. 완벽하게 기억하지는 못해도 책을 읽을 때만이라도 어떤 내용이었는지, 작가가 무슨 내용을 말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걸 잊지 않기 위해 책에 밑줄 치며 읽기 시작했다. 책은 항상 깨끗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밑줄 그으며 메모하면서 기억을 조금씩 늘려갔다.
책을 읽는데 왜 쓰면서 읽냐고 놀리듯 그와는 달리 그녀는 예전보다 책 읽는 재미가 붙었고 기억이 조금씩 오래 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제일 기억하지 못하는 건 사람 이름이다.
특히 연예인 이름이 헷갈려 제대로 기억 못 할 때가 많다. 머릿속 지우개처럼 꼭 한 글자씩 지운다.
뭐 덕분에 그녀는 창작의 달인이 된다.
"또 또 시작이다. 제발 사람 이름은 제대로 기억하면 안 될까?"
"흥! 당신 이름을 제대로 아는 것만이라도 고맙다고 생각해. 내가 당신 이름은 기억하잖아."
"차라리 기억나지 않으면 말을 하지 마. 희한하게도 영어 이름이나 잘생긴 사람 이름은 안 잊는다 말이야."
그랬다. 그녀는 잘생기고 예쁜 사람 이름은 잊지 않았다. 그녀는 외모지상주의는 아니지만 외모가 좋은 사람을 좋아한다. 그녀가 가지지 못한 부분을 가져서 그런 걸까. 희한하게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흠이 하나도 없는 얼굴의 주인공 이름은 꼭 기억한다.
사실 그녀는 누구를 기억하고 어떤 상황을 기억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어릴 적 겪었던 사건이 트라우마로 남아 언젠가부터 머릿속 지우개가 돼버렸다.
과거보다는 현재가 중요했고, 다른 사람보다는 내가 더 중요했기 때문에 꼭 기억해야 하는 것만 머릿속에 남기기로 자신도 모르게 약속처럼 되었다.
별거 다 기억하는 그는 늘 피곤하다. 가끔은 복잡한 일을 잊어버려도 될 건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되는 그다.
머릿속 지우개를 가진 그녀는 잘 잊기 때문에 그보다 여유롭다.
기억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에너지가 되기도 하지만 때론 불쾌함을 떠올리게 한다.
기억을 하든 안 하든 서로 다르기 때문에 어울리며 살아가는 그와 그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