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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달라져 버린 바벨탑 사건

교만과 불순종의 결과

by 위혜정 Jan 17. 2025

 언어 구사력은 인간과 동물을 구분 짓는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물론, 동물의 세계에서도 소통을 위한 소리, 혹은 합의된 몸짓 등이 존재합니다. 다만 인간의 언어만큼  세분화어 있거나, 기록을 위한 문자 체계 갖추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에 반해 지구상수많은 언어들은 고유한 소리와 문자 체계를 지고 있지요. 알파벳, 문법, 음소 등이 완전히 다른 언어도 있고 서로 비슷한 특징을 공유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모국어와의 유사성에 따라 배우기 쉬운 언어도, 배우기 어려운 언어도 있기 마련이. 



브런치 글 이미지 1



  언어 학습을 선호하는 사람에게 외국어는 언제나 통달하고 싶은 꿈입니다.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해결해야 할 칫거리이기도 합니다. 국경을 넘어선 이들과 막힘없 의사소통하기 위해서는  알아듣고 표현하기 위한 별도의 노력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하더라도 현지어만큼의 소통력 여전히 한계 있기도 하고. 전 세계 모든 사들이 동일한 언어를 구사했더라면 말끔히 해결됐을 문제일 텐데 말입니다.





바벨탑 사건: 창세기 11장



 '인간의 언어가 왜 이렇게 다양해졌을까?'에 대한 기록은 창세기 11장 바벨탑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니다. 창세기 9장, 노아의 방주가 등장하는 홍수 심판 이후 하나님께서는 무지개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시며 새로 시작하는 노아의 가족들에게 생육하고 번성 축복을 약속하습니다. 창세기 10장에서 노아의 아들 셈, 함, 야벳의 족보가 줄줄이 나열되면서 '자손의 번영'이라는 언약 성취의 과정을 보여줍니. 홍수로 진멸되었던 텅 빈  점점 많은 수의 사람들 채워지게  것이지요. 창세기 11장에서 그 당시 사람들이 사용던 언어에 대 기록이 나옵니다.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창 11:1)




 모든 사람들 사이에 단 하나의 언어가 통용되습니다. 어느 지역에 있든지 서로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합의점을 찾아갈 수 있 여건이 마련되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으 사람들은 합심하여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은 탑을 쌓는 데 에너지를 쏟아붓기 시작합니다. '그게 뭐 어때?'라고 넘길 수도 있지만  탑 쌓기에는 교묘한 두 가지 목표가 담겨 있었습니다.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창 11:4)




 첫째,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고자 습니다. 

역사적으로 바벨탑은 지상과 하늘을 연결하기 위한 신전으로 기원전 3500년 전,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건설되었던 지구라트(계단식 모양의 성탑) 전신이었습니다. 원래의 목적은 하늘을 뚫고 올라갈 만큼의 높은 탑을 쌓는 공명주의(공을 세워 자기의 이름을 널리 드러내고자 하는 삶의 태도)를 반영하는 것이었고요.



 공명주의적인 태도는 신이 되고 싶은 인간 욕망의 발로입니다. 거대한 탑을 쌓는 것 자체가 기적과 같은 일이었기에 바벨탑은 요즘에도 '실현가능성이 없는 계획' 혹은 '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감행하는 일' 뜻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당시 사람들은 신의 뜻을 거슬러가면서까지 자기 뜻을 세웠고,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자기 힘을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 즉 하나님의 권위를 넘보는 탑 쌓기를 감행했던 것이지요. 그 높이가 91m에 육박했다고 하니 시대적으로  도전이었던 것이 사실이었던 것 같습니다.




바벨탑(Tower of Babel), 뤼카스 판 팔켄 보르흐, 16C바벨탑(Tower of Babel), 뤼카스 판 팔켄 보르흐, 16C




 둘째, 사람들은 바벨탑을 통해 온 지면에 흩어져 생육하고 번성하길 바라셨던 하나님의 축복을 거슬러 '흩어짐을 면하자'는 합의실현하고자 했습니다.  여기저기로 퍼져서 땅에 충만하게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오히려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불순종을 위해 단합것이랄까요. 무엇을 지속적으로 축적하는 작업은 마음과 뜻을 그곳에 머물게 합니다. 언제든 떠날 채비를 하는 나그네의 가벼운 발걸음과 확연한 차이가 있고요. 



 비단, 삶에 대한 나그네태도는 차치하더라도 탑을 쌓아 올리는 행위 자체가 자기 결정, 자기 보호, 자기 업적 등 모두 중심이 자신으로 향해있습니다. 이를 꿰뚫어 보신 하나님께서는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만드십니다. 결국, 한 곳에 머물러있던 인류는 바벨탑 사건을 계기로 온 지역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그 이후 히브리어로 '혼란'이란 뜻을 가지는 바벨은  불순종의 상징으로 남게 되었지.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창 11: 9)



<출처: 한국창조과학회><출처: 한국창조과학회>





경계해야 할 삶의 바벨탑: 교만

  


 아이와 함께 모래사장에서 성을 쌓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저 높이 쌓는 것을 목표로 모래더미를 아래서부터 토닥토닥 다져가며 올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옆쪽 벽면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런 물리적 힘을 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요. "누가 부실 공사했어?" 하며 다시 모래를 공수해 와서 조심스레 쌓아 올렸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한쪽 면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이 아니겠어요? 불현듯 "왜 우리는 모래성을 높이만 쌓으려 했던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바벨탑을 쌓으려던 인류의 DNA가 내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흥미로운 생각이 딸려왔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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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단순히 재미난 생각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본래 인간은 자기 중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체 사진을 확인할 때 상대가 잘 나왔는지 체크해 주기보다 내 모습을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우리인걸요. 칭찬받기 좋아하고, 자신이 남보다 뛰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그렇지 않으면 상대를 질투하는 것이 본성입니다. 아무리 고상한 척 해도 우리 안에는 이미 교만이라는 유전자가 장착되어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그 영역의 너비와 깊이가 번져가는 사태를 늘 경계해야 하는 이유이지요.




 교만에 관한 성경 구절이 무려 132구절이라는 것을 보면 얼마나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교만을 미워하신다고  분명하게 밝히셨고요.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니
(잠 16:5)

 



 가장 큰 교만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는 강력한 '독립심'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의 손을 놓는 것처럼 말이지요. 아이가 커가면서 많은 서운함을 느끼는 말이 "엄마, 가요. 저 혼자 할래요."입니다. 잘 커가고 있음에 감사하지만 괜스레 허전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이러다 완전히 품에서 벗어나 뒤도 안 돌아보면 마음이 텅 비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어요. 다행히 하나님은 '낮은 자를 굽어 살피신다'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딱 붙어있으면 세심한 돌봄의 수혜를 입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벗어나려는 교만을 내려놓고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선택할 때 만 천하를 다스리는 분의 보살핌을 받는 것, 이것이야 말로 우리 삶에 크게 남는 장사가 아닐까요? 오늘도 그분의 손을 놓지 않는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여호와께서는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굽어 살피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심이니이다
(시 1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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