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의 소소한 기쁨
외국에서는 특히 더 한국에서만 먹을 수 있는 봄나물과 향채가 그리워지기 마련이다. 더덕, 냉이, 쑥, 도라지, 돌나물, 취나물, 고사리 등 그리운 나물은 많지만 개 중 외국에서 가장 키우기 쉬운 농작물 중 하나는 바로 깻잎이다.
여름이나 가을에 한국 친구집을 방문하면 깻잎을 조금씩 나누어 받거나 맛보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트러플이나 송이버섯, 유럽산 치즈가 희소가치가 높은 귀한 것이라고 칭해진다면 한국이 아닌 곳에선 이 깻잎 하나에 한국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니 아주 소중한 것이다. 한국에선 한 뭉치에 300-500원 하는 녀석들이 이곳에서는 이웃집에 으쓱댈 정도로 귀한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인지 이민자들의 화단이나 발코니엔 꼭 깻잎 화분이 몇 개씩 있다.
나는 매번 봄마다 키우고 있는데 작년에는 발아부터 대실패 해서 일 년 내내 심심하고 허전했다. 올해는 본격적으로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서울 도시에서 자라난 나에게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꽤 어색하고 쉽지 않은 일이다. 발아를 시키려고 키친타월에 올려놓고 물을 부어 놓으면 발아는커녕 하얀 곰팡이가 금세 생기기도 했다. 여러 번 실패 뒤 어렵게 발아시킨 깻잎을 조심히 작은 화분의 흙으로 옮긴다. 그리고 싹이 올라오면 조금 더 큰 화분에. 그리고 더 큰 화분에. 그리고 조금 더 큰 화분에. 여러 번 이사를 다니는데 이번이 마지막 이사라고 생각해도 쑥쑥 자라나는 깻잎에 이사를 10번씩은 더 했다. 그 때문에 뿌리가 잘리기도 하고, 자라는 데보다 자리를 잡는데 더 에너지를 쏟고 있는 깻잎에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 깻잎들을 보며 내가 이민을 다녔을 때 느낀 점들이 다시 떠오른다. 어느 익숙한 곳에서 다른 낯선 곳으로의 이사. 다시 시작. 그리고 익숙해질 만하면 다시 이민을 했더란다. 나도 어느 정도 어쩔 수 없이 뿌리를 잘라내고 새로운 터에서 시작하는데 얼마의 에너지를 쏟아냈을까?
깻잎은 또 서로 다닥다닥 붙어있으면 자리싸움을 하느라 키만 쑤욱 자라고 잎을 늘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처음 아기 싹이 올라올 때부터 넉넉하고 여유 있게 자리를 잡은 깻잎은 주변의 영양분을 충분히 섭취하는 데다가 주변에 자리싸움할 경쟁자도 없어 아주 잘 자란다. 또 이 흙은 넓이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깊이도 중요해서 얼마나 깊게 뿌리를 내릴 수 있느냐도 중요한 요인이다. 여유롭지 않은 곳에 다닥다닥 붙어 자란 깻잎은 비교도 할 수 없이 대도 얇고 비실비실하다.
나는 서울에서 치열했던 경쟁을 생각하며 혹시 내가 이 사회 속에서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키만 더 커지면 된다고 생각하고 바쁘게 살아왔는지 고민해 본다. 그리고 지금은 그래도 남들 눈치 안 보고 여유롭게 살고 있는지 돌아본다. 비교대상 없이 나만의 페이스로 깊고 넓게, 그리고 건강하게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흙의 넓이, 깊이, 이사정도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지는 이 깻잎들이 모두 같은 종류의, 같은 시기에 발아를 시작한 깻잎씨라는 것이다. 환경에 따라 어떤 이들은 잠재성을 쉽게 발현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같은 잠재성을 가지고도 사회의 환경에 따라, 경쟁도에 따라 비실비실 거리게 자라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한국에서 어떻게 자라왔는가 생각하면 재미있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슬퍼지기도 한다.